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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Dec 28. 2023

마을, 교육, 그리고 공동체 4

3부 "새로운 상상"

3부 새로운 상상

10년 전 몽상에서 시작한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이 현실의 정책이 된 후, 지난 10년 동안 다양한 주체들의 분투 과정을 거쳐 마침내 새로운 상상 앞에 섰습니다. 상상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대단한 능력은 꿈을 꾸고, 상상을 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하늘을 나는 새를 그저 부러워하기만 했지만, 다른 누군가는 새를 보며 인간도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상상을 했습니다. 몽상처럼 여겨졌던 그 상상은 현실이 되어 이제 인류의 시선은 지구를 너머 우주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상상을 넘은 몽상은 언제나 두 가지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현실에 없는 것에 대한 헛된 생각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중세의 신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은 현재 과잉된 이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성은 인간의 꿈을 빼앗아 갔고,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만 반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꿈을 꿉니다. 존 레논이 부른 “Imagine”의 가사처럼 내가 꾸고 있는 꿈을 모두가 함께 꿀 수 있다면 더 나은 내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제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의 새로운 10년에 대해 상상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1. 교육 주체에 대한 성찰과 교육 거버넌스

일반적으로 학생, 교사, 학부모를 교육의 3주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주체”라는 단어는 매우 모호하면서도 헛헛한 말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현장에서 그 모호하고 헛헛한 주체라는 단어를 각자의 지식과 경험과 신념을 담아 다소 폭넓게 사용하고, 요구하고, 주장합니다. 주체(主體)를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몸의 주인입니다.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몸은 오로지 자신의 몸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내 몸에서 나온자식한테도 ‘일’해라, ‘절’해라 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누구나 대한민국의 주인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대한민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함께 어떤 일을 도모할 때 주체라는 말에 그 어떠한 기대도, 집착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주체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주체라는 말은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회 속에서 내 몸 하나 어쩌지 못하게 되자 생겨난 모종의 욕망 같은 것은 아닐까요?


“이해당사자”라는 개념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주체에 비하면 매우 낯선 단어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주체라는 단어를 보다 직설적으로 “stakeholer”라고 표현합니다. “stakeholer”라는 단어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만약 10명이 힘을 합쳐 소를 한 마리 잡았다면 그 소를 분배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일까요? 소를 잡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 소를 잡기 전에 합의에 의해 분배의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 만약 10명 중 소를 잡는 데는 참여했지만, 소의 분배 방식이나 권한에 대해서는 합의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주체는 모두일 수도 있고, 모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소를 분배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주체이지만,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소의 분배를 결정할 수 없으니 그 누구도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폭력이든 합의든 소의 분배 방식이 결정될 때까지 10명은 모두 소(stake)를 잡(hold)고 있는 사람(er), 즉 이해당사자(stakeholder)로 존재합니다. 소를 교육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육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그것이 신념이든, 지식이든, 아니면 돈이든 우리는 모두 교육의 이해당사성을 가지고 교육거버넌스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공과 사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공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에게 대중들이 고민 없이 동의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판사에게 독립된 헌법 기관이라는 공적 권한을 위임했지만, 판사 또한 자신의 사적 감정을 완벽하게 배제할 수 없는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교육의 주체인 동시에 이해당사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비로소 교육을 보다 공정하게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교육거버넌스는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교육의 이해당사자임을 당당히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할 수 있습니다. 교육 사무에 관심이 없던 일반행정기관인 은평구청이 교육정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육에 관심이 있지만 학교와 어떠한 관계도 맺을 수 없었던 마을의 주민들이 학교 안에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아이만 교육을 통해 선발되는 것을 바랐던 학부모들의 시야에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삶이 펼쳐지고 있는 마을의 사정과 무관하게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을 운영하던 교사들의 시선이 아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은 교육에 대한 관심을 학교에서 은평 전역으로 확대시켰습니다. 교육에 관한 이해당사자가 학생, 교사, 학부모에서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주체로 확대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의 확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교육적 의미 또한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은, 교사는, 학부모는 진정한 교육의 주체일까요? 주체로서 교육에 대한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루빨리 주체 파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콘텐츠 연계사업> 이후 지난 10년 동안 은평에는 교육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마을강사들의 협의체인 <교육콘텐츠협의회>가 결성되었고,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을 전담하는 <구립은평마을방과후지원센터>도 문을 열었습니다. 역촌동과 갈현동에 청소년 문화의 집, <신나는애프터센터>와 <청소년센터 쉼쉼>이 개관했고, 교육의 문제에 다소 느슨하게 대응했던 시민사회는 <아동청소년 네트워크>를 결성했습니다. 또한, 2014년 교육우선지구, 2015년 혁신교육지구를 통해 다른 지역과 함께 마을교육공동체라는 가치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은평은 교육을 중심으로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그 경험들은 마치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도생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입니다. 새로운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다양한 주체들이 모여 그동안 변화된 교육의 지평과 새로운 교육의 미래를 상상하는 제2의 교육연구모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2. “연계”를 넘어 “관계”로

교육콘텐츠 ‘연계’ 사업은 마을이 가지고 있는 교육콘텐츠를 학교와 연계하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학교는 마을의 교육콘텐츠가 필요했고, 마을은 학교와 연계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012년 은평구청과 교육연구모임은 그런 마을과 그런 학교가 서로 연계할 수 있도록 중신을 섰습니다. 연계의 전제는 마을의 교육콘텐츠가 학교가 제시하는 교육적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마을의 소중한 자원이 학교의 기준에 맞지 않아 연계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계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난 10년 동안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은 꽤 다양한 성과를 축적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을과 학교는 성과를 바탕으로 한계를 극복하며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만나는 모든 사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만났다 바로 헤어질 수도 있고, 뜨문뜨문 만남을 이어갈 수도 있고, 마음이 맞는다면 매일 만나며 서로의 성장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수색동에서 살고 있는 마을 교사가 진관동에 있는 학교에서 수업을 한다면 시간이 지나도 그저 단순한 연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만, 녹번동에 살고 있는 주민이 녹번동에 있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만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축적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관계를 중심으로 진화해 온 인류에게 신뢰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렵과 채집으로 생존했던 원시인류는 부족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으며, 그 수는 던바의 수(Dunbar’s Number)인 150명을 넘지 못했습니다. 150명 남짓인 공동체에서는 소위 ‘평판’이라는 신뢰 기제를 통해 공동체를 유지했습니다. 굳이 산타 할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누가 착한 아이인지, 누가 나쁜 아이인지 적어도 150명 남짓의 공동체 안에서는 평판을 통한 측정과 변별이 가능했습니다.


저는 2012년 교육콘텐츠의 3대 원칙으로 ① 비교과, ② 마을과 학교의 상생, ③ 콘텐츠의 질을 내세웠지만, 2년 뒤 마을의 교육콘텐츠는 학교에서 원하는 질보다 마을과의 관계에 우선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한 번 보고 헤어질 사람과의 관계는 “기브 앤 테이크” 이상으로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매일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기브 앤 테이크”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관계가 지속되면 거래 관계에서 신뢰 관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은 어떤 측면에서 마을과 학교의 “기브 앤 테이크”가 매우 확실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줄 것과 취할 것이 명확하지 않았다면 마을과 학교의 연계는 시작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이 “교육콘텐츠 관계 사업”으로 나아간다면 “기브 앤 테이크” 이상의 시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기업 앞에 “사회적”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회적 기업은 참 이상한 말입니다. 학창 시절 사회시간에 배운 기업의 정의 안에는 굳이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달지 않아도 사회적 역할과 기능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면 사회적이지 않은 기업은 정상적인 기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업들이 지나치게 이윤만을 추구하다 보니, 사회적 역할은 점점 줄어들게 되고, 급기야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기능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육콘텐츠 연계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에 참여하는 주체들에게 손해를 감수하라고 요구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익을 맨 앞에 두게 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사회적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익은 사회적일 수 없습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익의 기준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빵을 10개씩 먹는 사람에게 이익은 10개보다 더 많은 빵을 먹는 것입니다. 반면 빵을 1개밖에 먹을 수 없는 사람에게 이익은 생존의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1개의 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10개의 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강제로 빵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사회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입니다. 빵 10개를 먹던 사람에게 공평하게 5개를 먹으라고 하면 배고파 죽고, 빵 1개를 먹던 사람에게 역시 5개를 먹으라고 하며 배불러 죽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이라는 말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차이를 다양성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그 다양성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모두가 행복한 미래를 합의해 나가는 것입니다.


연계는 필요의 교환이고, 관계는 신뢰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요의 연계를 넘어 신뢰를 구축하는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마을이나 학교나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학교는 마을의 교육콘텐츠를 단지 수월성의 재료로 인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을은 신뢰의 축적을 위해 경제적 이익을 다소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의 새로운 10년을 상상하기 위해선 마을과 학교가 단순한 연계를 넘어 어떻게 일상적인 관계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정책적 논의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3. 교육의 유일한 주체는 다름 아닌 “학생”

인간은 유아기와 아동 청소년기를 거치며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이루어낸 진화와 문명화의 전 과정을 교육이라는 제도를 통해 함축적으로 학습해 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사는 다름 아닌 자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전을 거듭해 온 과학문명의 관심이 인간이 발 딛고 있는 지구를 떠나 우주로 향하고 있는 21세기에도 자연은 마치 교실에서 말썽을 부리고 싶어 하는 초등학생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엄격한 교사처럼 여전히 인류에게 두려운 존재입니다.


자연의 일부에서 비롯된 인류가 자연에서 벗어나 첫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인류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어떠한 규칙도 읽어낼 수 없는 자연에게 신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처음엔 경외 그 자체였던 자연의 거대한 섭리 속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인류는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러한 경험의 축적이 인간의 문화가 되었고, 보다 적극적으로 자연을 이용하기 위해 자연을 관찰하고, 관찰한 자연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인류의 교사가 자연이고, 인류가 자연의 가르침 속에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면, 인류의 역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교육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교육과정과는 다르게 인류의 역사라는 교육과정은 교사인 자연이 아닌, 학습자인 인간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습니다. 인간은 대부분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교사인 자연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취했지만, 때로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처럼 반항하기도 하였으며, 또 때로는 상대적으로 향상된 독립적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학습자의 본분을 망각한 인간의 그러한 태도는 이따금씩 자연의 분노를 사 혹독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인류는 당당한 ‘성인’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인류가 왜 인간의 내재적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과정에서는 학습자의 주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요? 교육을 교육 제공자의 입장이 아닌 학습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그들의 창의적인 성장 가능성에 경의를 표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어찌 보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육 문제는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주도해 온 인류의 교육과정과는 다르게, 학습의 모티브를 제공할 뿐인 교육 제공자의 주도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교육의 주체는 학습자이고 교사는 지원자 또는 협력자일 뿐이라는 다분히 인류의 역사 속에서 검증된 공식을 이제는 우리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교육을 통해 아이의 성장을 지원하거나 심지어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교육과정이 확장을 넘어 빅뱅에 이르고 있는 정보를 모두 담아낼 수만 있다면 그 말에 적극 동의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이 경직된 국가 교육과정 안에 갇혀 있을 때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정보 환경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보를 적극적으로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고정된 과거는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잉태하고 있는 껍질일 뿐이며, 껍질이 헤게모니를 주장하면 현실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난 10년간 마을과 학교가 협력하는 새로운 교육의 지평을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이 빠뜨린 것이 있다면, 바로 학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이 시대의 가장 어리석은 사람조차 지난 세대의 천재보다 뛰어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 막스 글루크먼(Max Gluckman)의 말과는 다르게 우리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하찮게 여겨온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2022년 충북에서 진행한 학부모교육 연구에서 저는 학부모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습니다.


① 현실에 대해 아이들보다 모르며,
②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대해 책임질 수 없으며,
③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교육의 관한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존재…


앞으로의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은 마을과 학교에 있는 어른들의 케케묵은 경험이 아니라 빛나는 내일을 살아갈 아이들의 상상으로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놓고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골라 먹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먹고 싶은 음식(교육)을 마을의 강사와 학교의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 찾아주거나 만들 수 있는 교육콘텐츠는 어떨까요?


4. 글을 맺으며

지난 몇 달 동안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이 걸어온 지난 10년의 자취를 찾아 기록하기 위해 50명의 민관학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한된 시간과 저의 한계로 인해 모든 분들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이 걸어온 10년을 이해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10년 전 은평구의 민관학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만큼 훌륭한 정책을 추진하였고, 지난 10년 동안 다양한 난관과 맞서가며 좌충우돌 분투해 왔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한목소리로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의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혁신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것이고, 낯선 것을 익숙하게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면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상상이 필요합니다. 제가 앞에서 제안한 새로운 상상을 3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새로운 미래를 구상하기 위한 제2의 <교육연구모임>이 필요하다.
둘째, 마을과 학교가 연계를 넘어 일상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셋째, 새로운 상상의 중심에는 아동청소년이 있어야 한다.


신이 아닌 인간은 부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실을 언제나 다양성을 통해 보완해 왔습니다. 인류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이라는 장점을 권력관계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지금의 문명을 더 지속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수없이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다양성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고민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다양성이 완벽하게 수평적 관계로 존재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부정(不正)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부실(不實)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평등에 대한 과한 기대는 인간을 더 불평등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각자가 다른 기준으로 요구하고 있는 전방위적인 ‘공정’에 대해 기대와 더불어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 인류가 가진 다양성은 언제나 크고 작은 권력관계 안에서 존재해 왔습니다. 원시 인류는 여느 포유류처럼 종족 번식을 위해 모계 사회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농경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오랫동안 가부장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양성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계급이 대표적입니다. 잘 알려진 동화 <왕자와 거지>에는 계급의 본질은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본질을 가리고 있는 옷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풀기 위해 다양성에 주목한 가장 최근 사례로 “거버넌스”를 꼽고 싶습니다. 거버넌스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거버넌스가 시작된 이유를 국가 정책의 실패에서 찾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것 또한 신이 아닌 부실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거버넌스를 정책에 실패한 국가의 권력을 다시 시장(시민?)으로 가져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거버넌스는 시장의 실패와 국가정책의 실패를 모두 경험한 인류가 양자의 부족함을 깨닫고, 서로 보완하기 위해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은 2012년부터 은평이 실험해 온 교육거버넌스의 한 형태입니다. 교육거버넌스는 교육의 책임을 학교에 위임한 결과가 실패로 귀결되고 있으니 그 권한을 마을로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근대적 학교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실 교육의 역할은 마을의 몫이었고, 마을은 학교만큼 그 역할을 체계적으로 수행해 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교육은 학교가 해야 할 몫이 있고, 마을이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교육을 둘러싼 마을과 학교 사이의 주도권 다툼은 정작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입이 부르트도록 이야기하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습니다. 그 당연한 말에 모두가 고개만 끄덕일 것이 아니라 그 말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오징어처럼 끈질기게 씹고, 또 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이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저는 한 아이를 키우는 데 마을 하나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두 하나의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끝을 알 수 없듯, 우리는 한 명의 아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끝을 감히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경계를 특정할 수 있는 마을이 아니라 무한대의 우주를 뛰어넘습니다.


코로나19 시기에 열렸던 은평 교육콘텐츠 집담회에 참석한 한 마을강사는 학교에서 수업을 하기 전에 선생님으로부터 주의력이 산만한 아이 몇몇에 대해 귀띔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수업을 진행해 보니 선생님의 귀띔과 달리 그 아이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집에서 아이를 보는 부모가 그렇듯, 학교에서 아이와 만나는 교사도 아이의 단면만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농사가 모든 것의 기준이었던 시대의 어른들은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샐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범람하는 정보 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지금의 아이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입체적이면서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온 마을이 동원되어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시전하는 꼰대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불확실한 미래를 개척해 나아갈 아이들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지지하라는 의미는 아닐까요?


성급하게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은평에는 외부의 기준이나 평가에 크게 아랑곳하지 않는 소위 ‘부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자부심’에서 첫 글자를 뺀 부심은 보통 “부심 쩐다~.”처럼 특정 집단의 허세나 지나친 자부심을 조롱하는 용도, 즉 긍정적 의미보다는 부정적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평부심’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없는 이유는 은평은 부심을 주로 “난 너보다 우월해.”가 아니라 “괜찮아, 우리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의 의미로 사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란 다 각자 걷는 것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 열패감을 느끼느니 차라리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집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혹시라도 <교육콘텐츠 연계사업> 10년을 돌아보며 “우리가 최고”라는 만능감에 취한다면 더 이상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사람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곤경에 빠집니다. 아이보다 어른이, 여성보다 남성이, 보수보다 진보가, 행정보다 민간이, 마을보다 학교가 더 우월하다는 확신이 우리를 끊임없이 곤경으로 내몰아 왔습니다. 만약 은평부심이 다른 지역보다 은평이 우월하다는 만능감의 표현이었다면 <교육콘텐츠 연계사업>은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육콘텐츠 연계사업> 10년의 과정에서 좌충우돌 분투해 오신 모든 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전하며, 부족하지만 은평 교육콘텐츠 연계사업, 10년의 기록, 『마을교육 그리고 공동체』가 은평이 상상하는 새로운 교육의 미래를 위한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채희태 (전 은평구청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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