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칠의) 도를 아십니까?

by 이냐니뇨

나는 이 집 곳곳을 칠했다. 욕실 벽이랑 문, 방문이랑 창틀, 욕조까지. 페인트 통 뚜껑을 열자 색은 내 생각보다 밝았고, 냄새는 생각보다 강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 예상은 조금씩 빗나간다. 셀프 인테리어의 길은 그런 것이다. 롤러를 굴리자 팔이 점점 무거워졌다. 바닥에는 흰 점들이 흩어져 있고, 양말에도 페인트가 묻었다. 이미 작업복으로 입은 옷은 이 일이 끝나면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오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과, 어쩐지 웃음이 동시에 올라왔다.


당시 사진을 바탕으로 GPT가 그려준 페인트칠하는 나.



이 집은 구조는 꽤 좋은 것 같은데, 어딘가 정돈되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이유 중 하나는 전 세입자가 어설프게 칠해 얼룩덜룩한, 심지어는 여기저기 삐져나온 페인트 때문인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홍수를 막듯 집을 관리해 왔는지, 주로 망가진 곳만 군데군데 칠했던 듯 페인트 자국이 고르지 못했다. 손재주는 없어도 취향이 독특하진 않았던 게 다행이었다. 모든 페인트칠 자국은 흰색이었으니까.



완벽주의자인 나는 또 열심히 리서치를 하면서 페인트의 종류와 용도, 그리고 제품 후기 같은 것들을 정말 열심히 찾아봤다. 집에 고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수리 일정이 정말 빠듯했다. 그런데 그걸 다 하고 다음으로 할 페인트에 대해 조사를 하는 나의 일정은 정말 하드코어였다. 하지만 당연히 이것은 서론일 뿐이었다.


본격적으로 페인트칠을 시작했다. 페인트는 한 번만 발라서는 도무지 고른 색감이 안 나온다. 뭐, 원래 페인트는 2번 칠하는 게 기본이다. 흰색으로 망쳐 준 고마운 전 세입자 덕에 젯소 작업은 생략해도 되어서 다행이었다(진심이다.) 페인트칠은 빨리하고 싶다고 한 번에 페인트를 많이 바르면 페인트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려 벽에 눈물이 맺힌다. 까탈스러워도 뭐 어째.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걸.


겨울이라 페인트가 마르는 데도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다른 작업을 하면서 페인트가 굳기를 기다리는데, 적어도 2~3시간은 말리는 게 정석이다. 앞서 바른 페인트가 다 마르기 전에 다시 페인트칠을 하면 까딱하다간 앞서 바른 페인트가 벗겨지며 뭉쳐 버린다. 그러니까 이건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속도를 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닌 것이다. 하.. 난 집에 빨리 가고 싶단 말야.. 그냥 묵묵히 바르고, 말리고, 덧바르고. 지름길은 없다는 걸 성질 급한 나에게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작업이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흔한 말이 있다. 빨리하려고 서두르다 보면 오히려 일을 망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일을 하든 통하는 말이지만, 몸으로 하는 이런 작업들에는 더더욱 그런 것 같다. 한 번에 두껍게 빨리 바르겠다고 조금만 욕심을 내면 페인트가 흘러내려 오히려 긁어내고 다시 칠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마스킹 한번 빨리해 보겠다고 대충 하면 붓질이 엇나가서 또다시 칠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집을 고치는 내내 도를 닦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런 말도 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할 뿐." 내가 무슨 무림의 고수가 되고 싶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냥 쉽게 상처받고 또 쉽게 다음을 기대하는 나를 다독이는 주문이다. 난 지금 살아있으니, 이 경험을 통해 인간적으로 많이 레벨 업했다는 생각을 한다. 영영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면 그게 가장 좋은 인생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만, 사실 나의 경우는 그런 인생을 살지 못했다. 아니, 그런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럼 기왕이면 그냥 끙끙 앓지만 말고 이걸 나의 좋은 비료로 삼아, 영양분을 최대한 쏙쏙 흡수하면서 근육을 만들고 다음번에는 덜 아프길, 덜 힘들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잔뜩 엄살을 떨었지만 페인트칠 작업은, 사실 이 낡은 집을 고치고 꾸민 다른 작업들에 비해서는 쉬운 편이었다. 붓질 한번 할 때마다 눈앞에 바로바로 성과가 보이니 보람차서 덜 힘들게 느껴지기도 했다. 비록 내 급한 성질머리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눈에 띄게 밝아지고 정돈된 집의 모이 모든 건 보상해 주었다. 심지어 나는 이제 페인트칠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지 않았는가!



#뚝딱대는 구옥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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