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이성(理性)에게 자리를 내어준 내 감성의 소멸이 종국에 나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생각했다. 감각에 자신이 없는 나는 지금도 불평을 한다. “잃어버린 내 감성의 자유는 어디에서 찾겠소.” 생각해보니 내 생각이 이성이란 가면을 쓰기 시작한 것은 푸른 잉크와 펜을 사용하고부터다.
이성이란 본능, 충동, 욕망 등에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 도덕적 법칙을 만들어 그것에 따르도록 의지를 규정하는 능력. 적어도 칸트의 정의는 그렇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로지 감성만이 유일한 무기이며 수단이던 13살의 내게 얼른 코흘리개 감성에서 벗어나 이성적인 사람으로 커야만 한다는 주위의 채근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중학생이 되어 점잔을 뺀다는 것이 딴에는 낯간지러운 일로 마치 가면을 쓴 것과 같았다.
엄격한 제복이야 그렇다 치고, 이성적 인간이 된다는 것의 다른 한 편에는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쓰고 기록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언제든지 고쳐 쓸 수 있는 연필과 달리, 지울 수 없는 글을 만들어 내는 펜과 푸른색 잉크의 등장은 처음부터 엄했다. 그 미완의 액체는 눈과 손에 익지 않은 알파벳은 물론, 한글 또한 명조체처럼 모양 좋게 써야 한다고 늘 명령했다. 일기 같은 것도 이 엄한 도구들로 기록되었고, 선생님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일기장 검사를 하므로 나는 형식뿐만이 아니라 내용마저 매우 이성적 기준으로 써야 함을 자연스레 배우고 있었다. 그 푸른 기록을 통하여 나도 모르게 어른의 기준에 한 발자국씩 다가가고 있었다면 말이 될까?
‘어른 만들기’에 조급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만년필부터 사 주셨고, 그 이름이 '파카21'이었다. 최고급품인 ‘파카51’보다는 못하였지만 흔치 않았던 물건이라 좀체 쓰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작은 내 손아귀에는 너무 굵었으므로 불편했다. 덕분에 필기는 주로 저가의 '파일롯트'나 '아피스' 만년필이 대신하고 '파카21'은 늘 서랍 안에 고이 모셔졌다. 가끔 꺼내어 만져보면, 만년필 주위엔 언제나 아버지의 열망이 함께 맴돌았다. ‘파카21’은 아버지의 훈장이었으며 내게는 일종의 채찍이었다. 시간이 가자 나의 ‘어른 되기’에도 슬슬 물이 올랐다. 스스로 처칠이나 슈바이처 박사와 같이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나와 잉크의 동반은 참으로 길었다. 그 푸른 지옥은 디지털의 시대가 된 지금까지도 분기탱천하며 나를 저희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한다. 지금은 검은 지옥 속일까? 푸른색에서 바뀐 것은 제록스의 시대를 맞아 검은색이 복사가 잘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란다. 간혹 지면에 붉은색이나 녹색과 같이 다양한 색이 섞이긴 하지만, 그 정도의 화려함으로는 좀체 그 딱딱한 이성의 세계에서 나를 구출해내지 못한다.
반면, 만년필이 내게서 사라진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볼펜을 거쳐 사인펜, 플러스펜의 시대를 지나고 디지털의 시대가 도래하여 글씨가 모두 컴퓨터 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말이다. 나의 ‘파카21’ 또한 아련한 내 기억 속에만 있다. 그 아련함의 끝에는 푸른 잉크와 만년필로 인해 가면의 뒤편으로 숨어버린 내 감성의 자유도 있겠지? 그럴까?
아들이 엊그제 여행에서 돌아와 내게 선물한 것은 ‘라미’라는 독일제 만년필이었다. 게다가 장착된 기본 카트리지의 잉크가 푸른색이다. 실로 오랜만에 푸른 글씨를 써 보았다. 내 이름, 저의 이름, 아내의 이름을 적고 주변의 물건들을 간단하게 묘사해 보는데, 지금까지의 어느 필기구에 못지않게 손에 꼭 들어맞는다. 잡는 느낌과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느낌이 단연 최고다. 신이 나서 책상 주변의 물건들을 여럿 묘사하였다.
희한한 것은 그 펜촉과 종이가 스치는 미세한 느낌으로부터 내가 일찍이 단정 지은 이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있었던 감각의 세계가 하나둘 생각나더라는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세상의 일을 잊고 내 감각의 세계에 몰입하였다. 마치 가면을 벗어버리고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 처음부터 내가 원하던 자유, 그 미지의 목표를 향하는 발걸음의 가벼움을 오랜만에 느낀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푸른 잉크와 만년필을 통하여 감성의 숲에서 이성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했던 내가, 다시 그것들을 통하여 그 짙은 감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감각에 몰두하게 되다니. 즐거워서 아들에게 말했다. “야! 네가 사온 만년필이 여태껏 내가 써 본 필기도구 중에는 최고다. 내친김에 그림을 좀 그려 보아야겠어.” 아들이 빙긋 웃었다.
내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도 아들이 얼른 어른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다행히 아들은 별문제 없이 중학교를 시작으로 대학에까지 이르렀다. 유학은 못 보내더라도 유럽 여행이라도 권유할 요량이 생긴 것이 어찌 내 아버지가 ‘파카21’을 내 손에 쥐여준 마음과 다르랴. 저인들 생각이 달랐을까? 여행 중 ‘볼로냐 대학’ 경제학부 건물을 홀로 거닐고 있다는 카톡 문자를 보고, 나는 아들의 여행이 제가 좋아하던 음악에의 길을 잠재우러 떠난 여행이라는 데에 더 무게를 두었다.
내 권유로 시작된 아들의 유럽 여행은 한동안 제 서랍 속에 깊이 간직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면 아비가 남긴 훈장처럼 꺼내어 보겠지. 순간 나의 채찍을 보는 듯 손사래 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 또한 아들이 얼른 어른이 되길 바라는 평범한 아버지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테니. 그때마다 그저 잘 이해하길 바랄 뿐이다.
오늘은 아들의 선물을 계기로 쓰기와 그리기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기록해야 할 일은 늘 일어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기록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려야 할 대상 또한 언제든지 눈에 뜨이지만 대부분 열망에 그치니 아쉽다. 하여 대상과 나는 서로가 양에 차지 않음을 불평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무언가를 주고받는다. 아들과 나 사이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즐거운 것은 제가 내게 푸른 잉크가 든 만년필을 선물했다는 것이고, 나는 그것들을 통하여 내 감각의 세계를 찾을 용기를 낸 것이다.
삶은 끊임없이 쓰고, 그리고, 또 지우는 것. 그 모두를 어찌 하나의 단어로 단정 지을까. 일찌감치 이성과 감성을 편 가른 내 생각은 처음부터 틀렸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