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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딩굴딩굴공작소 Jun 03. 2022

[작심(作心)3일] 3편. '벗'

매월 3일, 마음에 담아 마음을 담는 DDF 새 프로젝트 작심(作心)3일

벗; 朋

박시현     


내가 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글자가 '朋', '學' 두 글자이다. '벗'(朋)과 '배움'(學)이다.


'배움'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가 했듯이 늘 배우는 삶,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을 말한 것 같다. 두 번째 글자가 '벗'인데 논어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朋'자 때문이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반갑지 않니 한가"

이 글귀에 나오는 벗이라는 글자를 학창 시절 친구라면 모든 걸 제쳐두고 뛰쳐나갈 때부터이다.


세월이 지나 여기에 나오는 벗은 혈기왕성할 때 '의리'를 외치던 친구 같은 말이기보다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지 같은 뜻이 더 올바른 해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생교육을 공부한 이후 지금까지 배움으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 다행스럽고 고맙다. 인생 후반전 이런 벗들과 늘 함께하고 싶다.     


덧붙이는 말

논어를 한차례도 똑바로 읽지 못한 내가 논어를 너무 많이 끌어 쓰는 것 같다. 앞선 두 글자는 학문으로 잘 알아서가 아니라 내 삶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라 야단치지 말아 주시길 바란다. 또한 논어는 내가 앞으로의 삶에서도 벗처럼 더불어 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서로를 알아가는 사이

한성근     


나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장 13절)’ 성경에서 최고의 사랑을 표현한 구절이다. 친구를 위하여 무엇까지 줄 수 있을까? 벗이라는 이번 주제에서 ‘서로를 알아가는 사이’라고 제목을 정한 것은 이에 기인해서다.     


서로를 안다는 것은 대단히 주관적일 수 있다. 하지만 함께한 시간에 비례해 서로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가늠해 볼 수 있다.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서 무엇이든 이야기가 가능한 사이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만남의 질이 물리적 시간의 길이를 이기는 것도 경험했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이가 된다. 이것이 내가 벗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내게 벗은 서로를 알아가는 사람들로 규정한다. 적어도 내게는 서로를 알아가려고 해야 벗이라는 할 수 있다. 그리고 잘 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안다는 교만을 성찰한다. 그래서 늘 궁금해하고 그리워한다. 그리움은 반가움이 되고 만나면 서로의 이야기에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날 벗들과 밤을 지새우며 서로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서로 합의에 이른 내용이 ‘언제 연락해도 미안해하지 않기’다. 연락할 때 미안해하거나 배려하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 대한 배려를 걷어 버림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했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벗들을 떠올린다.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벗들도 있다.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임을 마주할 때 기적이 일어남을 느낀다.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서로를 알아가며 동지애를 느끼며 안타까워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세상을 살맛 나게 하는 사람들이다.




친구와 벗 사이

권창숙     


“너를 만나고 세상이 모두 변했어

의미 없던 하루가 소중해졌으니 그냥 길을 걷다가도 괜히 웃음이 나와”     


차 안에서 잔잔하게 나오는 멜로디와 음색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가사가 완전히 귀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노래가 맘에 들어서 검색을 했다. 노래 제목이 ‘벗’이다. 가사가 조금은 제목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벗이라는 개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위의 가사는 마음에 와닿았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있다. 친구라든지, 동무라든지.


동무는 어깨동무, 길동무 등 다른 명사와 함께 쓰는 정도로 사용할 뿐 분단국가의 특징을 가지고 어릴 때부터 통일교육을 받아온 우리(?)는 동무라는 단어로 친구나 벗을 표현하지 않는다. 친구는 벗에 비해서 굉장히 포괄적인 느낌이다. 유치원 또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우리 반 친구라는 표현을 써서 아는 사람, 공동체에서 함께 하는 이들까지도 친구로 표현한다. 어찌 보면 친구라는 단어로 사람들 간의 경계선을 긋는 것 자체도 안과 밖, 너와 나처럼 이분법적일 수 있겠다.     


얼마 전 ‘사고뭉치’ 영상의 주제가 흐뭇함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기뻐하는 모습, 성장, 성공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 흐뭇함이라고 영상을 찍었다. 누군가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흐뭇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기쁨을 기쁨이라는 그 자체로 오롯이 느낀다는 것이며 타인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다는 것이니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누군가가 나의 기쁨, 성장, 성공을 흐뭇하게 생각해 준다면 나 역시 기쁠 것이다. 이런 흐뭇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벗이지 않을까.


사람 사이에 만난 시간이 오래된 것과 마음이 닿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만난 지 20년이 되어도 늘 제자리일 수도 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경험을 공유하며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거기서 생기는 서로에 대한 이해, 공감, 배려는 그들을 가깝게 한다. 거기에 애정, 응원, 안타까움, 슬픔이 더해져 벗이 된다.     


나의 못난 부분과 마음조차도 보일 수 있다. 그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할지 등은 아예 머릿속에 없다. 나의 어떠한 ‘꼬라지’ 조차도 ‘나’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믿음인 듯하다. 머릿속을 스치는 몇몇이 있다.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게 느껴진다. 뭐 하고 있을까? 전화나 해봐야겠다.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

전하영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에 등장하는 창대는 성공(?)을 위해 열심히 성리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글 속에 갇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해양생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나 그저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물고기를 잡는 삶을 살고 있다. 반면에 정약전은 실천 없는 학문이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상황으로 인해 귀양을 와 창대를 만나 해양생물의 특성을 기록한 자산어보를 집필하게 된다.     

양극단의 삶에서 각자의 삶의 질곡을 겪다 우연처럼 만나 서로의 가치를 지향하게 되는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벗이 될 운명이었을 것이다. 정약전은 창대의 영특함을 빌어 자산어보를 완성하고 싶어 하나 끊임없이 세상으로 나가려 하는 창대에게는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성리학만 중요하게 여기는 창대에게 성리학과 서학은 적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할 벗이라 말하며,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 말은 창대에게 배움의 가치를 새롭게 보게 만드는 하나의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이들의 대화는 학창 시절 정약용 사상을 배울 때 늘 등장했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잘 보여주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삶과 앎’은 하나임을 증명하고 있는 평생학습의 가치를 느끼게 해 줬다.     


‘배움 없는 실천은 무모하고, 실천 없는 배움은 공허하다’

최근 강의하면서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삶과앎 모두의 평생학습’을 통해 삶과 앎이 하나임을 확인하고 배우고 실천하는 삶의 가치를 담아내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함께하는 벗들이 있기에 힘들어도 씩씩하게 헤쳐나가기도 한다. 이들과 함께 하는 모든 활동은 나를 더 깊어지게 하는 활동이다.      


또래의 친한 사이의 느낌을 주는 ‘친구’는 말보다 나이나 배경 등과는 상관없이 삶의 가치를 함께 지향하는  의미가 느껴지는 ‘벗’이라는 말이 더 소중하게 여겨지며 지금 함께하고 있는 우리를 떠올리게 한다. 업무적인 일을 하는 동료가 아닌, 배움과 실천의 일상을 함께 하는 벗이 있어 참 좋다.




반려(伴侶)의 존재          

최정연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켠다. 익숙한 시그널 음악과 함께 들려오는 디제이의 음성은 여러 채널을 유목민처럼 떠돌다 마침내 찾아낸 내 맘에 쏙 드는 채널이다. 계속 떠들어 대기만 하면 혹여나 내가 지루해질까 싶어서인지 중간중간 교통상황도 알려주고, 날씨도 일러준다. 방송국과 피디의 이런 다양한 노력 중에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건 무엇보다도 노래와 음악이다. 해가 쨍쨍한 날이면 경쾌하고 맑은 목소리의 노래에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지고, 비가 오면 90년대를 풍미했던 싱어송라이터들의 사연에 심장이 말랑해진다. 강의자료나 밀린 보고서, 글을 써야 할 때는 가사 없는 클래식이 제격이다. 하루를 사는 나의 24시간 속에는 사람도 있지만, 음악과 노래를 들려주는 라디오가 항상 곁에 있다. 이쯤 되면, ‘라디오는 내 친구’라던 모 방송국의 캐치프레이즈는 정확히 나를 정복시켰다.     


벗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 사람이 늘 가까이하여 심심함이나 지루함을 달래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벗이라면 사람만 떠올렸는데 사실 나의 일상을 채우는 것은 사람이 아닐 때도 많다. 누군가는 자식보다 더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준다며 강아지에게 위로받고, 말 한마디 없지만 사랑을 주는 만큼 꽃을 피워내는 화초에 마음을 의지하기도 한다. 어느 예능프로에서는 귀여운 돌멩이와 대화도 나누고 예쁜 모자 씌워 여행도 함께하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의 출연자도 있었다. 벗이 서로 친하게 지내며 늘 가까이에 두고 심심함과 지루함을 달래주는 존재라면 이들은 그냥 강아지, 화초, 돌멩이가 아니라 이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벗, 반려의 존재임이 분명하다.     


문득 떠올려 보니, 예전엔 배우자를 일컬어 반려자라고도 불렀다. 내 인생의 반려자는 나의 배우자가 되어 함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우자와 자식이 있어도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위로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일까. 배우자를 반려자라고 부르는 시절은 가고 이제는 사람이 아니어도 반려의 짝꿍이 되는 시대가 왔다. 참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백 세쯤은 당연히 살 거라고 기대하는 긴 생애 시대가 불러온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나를 반려해 줄 벗을 찾기 위해 내 마음이 가는 곳에, 나를 투영한다. 가족이 아니면 어떻고 강아지, 고양이면 어떠하랴. 화초와 돌멩이도 반려의 타이틀을 차지하는 이 시절이 참 재미있지 않은가. 나에게 꼭 맞는 반려 존재를 찾아내고 그와의 일상을 채워가는 사소한 일상은 분명 우리를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라디오를 들으며 지금 이 글을 쓰는 내가 그렇듯이.




벗이란...

김동희


벗이란...

'함께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에게는

총 세 종류의 벗이 있는 것 같다


우선

어릴 적 추억 속에 사는 벗이 있다.

그 벗은 나의 삶 속에 뿌리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내 그리움의 원천이며

나의 정서적 성장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 번째 벗의 종류는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함께 일을 하며

심리적 교감을 나누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벗이다.


학연과 지연 그리고

나이를 떠나서

그저 함께 어울려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일도 같이 하며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꿈마저도 비슷한

그런 존재를 나는

벗이라고 생각한다.


추억 속의 벗이 나의 삶의 뿌리였다면

현제 나와 함께 하는 벗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나무의 줄기가 되고 잎이 되고 열매가 되고 있다~

한마디로

내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그들이다~


오늘도

나는

내가 벗이라고 여기는

그들과  함께 공작할 것들을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음 짓고 있다.


세 번째

내가 벗으로 생각하는 것은

나의 '자동차'이다.


나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며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


내가 떠나는 모든 길에서 함께 하는

나의 자동차에게 이름도 지어주었다

'길벗'

길 위의 친구!


차 안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울고불고~

그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는

나의 자동차 또한

나의 진정한 벗이라고 하겠다!


나의 벗들이여

오래도록 건강하게

보아요~♡




딩굴딩굴공작소(DDF; Dinggul Dinggul Factory)는 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평생학습공동체 '삶과앎 모두의 평생학습'의 공유공간이자. 일상을 작당하는 실천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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