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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딩굴딩굴공작소 Apr 03. 2022

[작심(作心)3일] 1편.  '나'

매월 3일, 마음에 담아 마음을 담는 DDF 새 프로젝트 작심(作心)3일

나와 일

권창숙


나는 왜 사는가?

인간은 삶의 목적이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나는 그렇게 엄청난 일을 목적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 것 같진 않다. 단지 한번 사는 인생을 잘 살고 싶을 뿐이다. 조금더 긍정적인 감정을 많이 느끼고, 나의 힘듦을 잊게 만들어 주는 행복감에 또 한번 속아가며, 나에게 칭찬과 격려를 해주며 살아가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

10대의 나는 내가 가장 소중했다. 그 때 모든 것의 결정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요인은 무엇보다도 나였다. 하고 싶나? 하기 싫어도 해야 하니? 어찌됐든 나의 감정이 최우선이었다. 지금 40대의 나는 여러 모습의 나로 나뉘어진다. 한 사람의 아내이고, 한 아이의 엄마이며, 한 사람의 딸이고, 한 사람의 며느리이며 그리고 ‘나’이다.

나의 역할은 늘어났고 또한 그 역할들은 비중은 계속적으로 변화하나 어느 하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30대의 나는 이 역할 중 엄마로서의 비중이 가장 컸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며 ‘나 자신’의 비중이 늘어났다. 그리고 요즘은 암 투병을 하고 계신 엄마의 딸로서의 역할 비중이 예전보다 늘어났다.

얼마전 여러 역할과 그에 따른 시간 배분에 고민을 하던 나는 우선순위를 정해보고자 했다. 상담자로서 강사로서 다른 사람들의 우선순위 세우기 활동은 도왔지만 실제 나의 우선순위를 정하려고 하니 쉽지 않았다. 우선순위를 세우기 위해선 자신의 비전, 가치관, 목표가 서 있어야 했고 오롯이 나를 기준으로 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어려웠다.

우선순위를 세웠다가도 현재 간병을 필요로 하는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면 우선순위를 너무 나를 중심으로 정한 것 같아 이기적인 것 같았고, 감정에 휘말리지 말고 냉정하게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또 무너져다.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고 수첩을 덮었다.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에게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지금, 여기의 나로서 생각해 본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에서 보면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로 나아가며 아래 단계가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윗단계로 올라간다. 그러나 100% 충족되지 않아도 윗 단계로 올라갈 수 있기에 사람들은 몇가지의 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나도 자아실현의 욕구를 추구하나 그 단계로 올라가기 위한 과정에서 많은 혼란과 고민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 역시 직업을 통한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누군가에게서 인정받고 싶다. 떼를 지어서 으샤으샤하는 과정안에서의 충만함은 혼자서 활동할 때에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감정이지 않나.

여러 조건들 속에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일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 앎의 재미 등이 나의 삶의 목적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고민과 어려움을 겪지만 그걸 넘어서 조금더 발전하는 나를 보면 앞에서 이야기했던 긍정적 감정, 행복감의 횟수와 빈도가 늘어나기도 하고, 나를 이해하고 조절하는 과정을 실천하다보면 나의 부정적 감정의 크기가 줄어드는 경험도 한다. 이거다. 나는 나 고유의 색깔을 가진 사람으로서 타인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기에 일은 나의 수단이자 과정이자 결과물이며 동기이다. 현재의 나의 상황에 따라 수행활동의 양이나 기간에서의 변동은 유연성을 가지고 대처해나가야 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우선순위를 정해봐야겠다.




생의 한 가운데에서 진짜 나를 마주하려한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냐 너!)          

김동희


어릴적부터 가져왔던 질문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으로부터 나의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때론,

생명의 탄생의 과정이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되어질 때가 있다.

그렇게 어마 어마한 경쟁을 뚫고 마치 천지창조를 하듯이

한 생명이 잉태되어 태어났는데.....

그렇게 고귀한 생명으로 태어났는데...

그런 위대한 탄생 치고는 우리 인간들의 삶은 그다지

신비스럽지도, 찬란 하지도 않은 것 같다.     


주변을 보라,

정말 거지같은 삶이라 여기고, 이번생은 망했다고 말하며 윤회를 믿지도 않으면서

입버릇처럼 다음생을 기약한다.     


차라리,

그냥 젊은 남녀의 유희속에 우연히 태어나는게 인간이라고 말해줬으면, 우리들의 삶은 좀 더 윤택해 보이고, 좀 더 아름답고 숭고하게 느껴졌을까?     


지금 나는,

50을 넘어선지 몇 해 되었다.

나의 삶을 돌아보니

유성처럼 잠깐의 섬광 같은 행복들을 빼고

수많은 시간은 온통 두려움과 슬픔과 고독으로 살아내어 왔던 것 같다.

그 찬란한 탄생에 비해 너무나 허무한 삶이라는 것이다.     


생의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이 허무함이란

진짜 거지같지 않은가?     


그래서,

시작점을 바꾸기로 했다.     


인간의 탄생은 어쩌다 이루어진 일이고,

나는 그런 하술한 탄생에 비해 아주 잘 살아내어 왔고,

남은 생도 빛나리라!!     


이런 허무한 생각으로 또 나를 잠시 지탱하도록 돕는 에너지를 방출하는

그런 능력을 가진

나는

김동희다.            

   



나에게 딩굴딩굴공작소(ddf)란?

박시현

   

쉰이 넘어서부터는 살아온 어느 날 보다, 살아갈 어느 날 보다, 오늘 하루를 보람되고 즐거움으로 가득 채우는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살아가는 곳도 마찬가지다. 지금 살고 있는 여기 ddf에서 나의 바람들이 하나씩, 둘씩 이루어지도록 살아야겠다.

몇 년 전 딩굴딩굴공작소 송년회 모임에서 '나에게 ddf'란 질문에 나는 경로당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지난날의 경로당은  동네 어르신들의 만남과 대화의 장소로 충분한 역할을 했지만 앞으로의 경로당은 100세 시대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배움을 통하여 새로운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경로당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믿는다. 내가 바라고 만들고 싶은 것이 이런 경로당이고, 그곳이 바로 ddf이다.

공자의 '호학'(好學)을 흉내 내기도 어렵지만 늘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 자신을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 늘 공부하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내 명함 이름 앞에는 'ddf 지기'라 적혀있다. 언제나 배움을 바라는 이들이 지금 이 순간, 이곳 ddf에서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과 배움의 즐거움을 함께 하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  

전하영

   

올해 새롭게 시작하는 딩굴딩굴공작소의 프로젝트 “작심(作心)3일”은 매월 3일까지 하나의 글을 써서 발표하는 프로젝트다. 첫 번째 주제는 “나”에 대한 것인데, 세상의 모든 출발은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선정한 주제라 할 수 있다. 나의 첫 글 제목은 가장 진부하면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나는 누구인가?’로 정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지난달에 딩굴딩굴공작소 공작원 워크숍을 개최했다. 오랜만에 자연을 만끽하는 힐링의 시간과 우리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던 중 짧은 워크숍에서 자신의 별명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세 개의 별명을 떠올렸다.

     

‘까까머리’, ‘별종’, ‘포커페이스’     

초등학생(당시에는 국민학생) 시절에 소위 스포츠머리라 불리는 짧은 머리를 하고 다녔기에 여학생들이 놀리듯 붙여 준 별명이 ‘까까머리’였다. 자칫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성에 서서히 눈뜨는 시기에 좋아하는 여학생이 불러줬기에 김춘수 시인의 ‘꽂’처럼,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소년시절 순수한 추억의 한자락으로 남아 있다.     


중학생 시절 만화책에 빠져 지내며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선택한 ‘상상과 공상’은 사춘기와 맞물려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 때면 언제나 멍한 듯한 표정을 짓고 엉뚱한 말을 하기도 해 친구들이 ‘별종’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이 별명은 세상과 단절된 나만의 세계에 대한 친구들의 손짓처럼 느껴져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별종스러운 나의 모습은 성인이 되었어도 종종 나타났다. 힘들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 생기면 공상의 세계로 숨어 버리곤 했는데, 이를 보고 주변에서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냐고 묻곤 했었다. 군대 시절 선임병이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멍한 표정을 짓지 말라고 말하면서 속내를 알 수 없다 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붙게 된 별명이 ‘포커페이스’다.      


나는 ‘포커페이스’라는 별명을 참 좋아한다. 무언가 감추고 싶은 것들이 많은 것도 아닌데, 포커페이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감정 표현이 서툰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별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성격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불편한 점들도 많이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도 주기에 지금도 포커페이스 유지를 잘하고 있다.    

 

별명은 그 사람을 투영하고 있다. ‘별명이란 사람의 생김새나 버릇, 성격 따위의 특징을 가지고 남들이 본명 대신에 지어 부르는 이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봐도 별명이라는 말은 그 사람의 또 하나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별명은 본인이 아닌 타인이 지어준다는 것이다. 주체적인 ‘나’이 모습이 아닌 상대적인 ‘나’가 별명인 것이다. 어릴적 기억을 떠올려 보면, 별명 때문에 신이 난 아이가 있는 반면, 별명 때문에 울음을 터뜨린 아이도 있었다. 별명은 세상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실존적 물음이자 사회적 물음이기도 하다. 나를 중심에 두고 세상을 살아가는 요즘이지만, 타인과의 관계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먼저 ‘나’가 있고 ‘너’와 ‘우리’가 있는 것이지만 ‘너’와 ‘우리’가 없는 ‘나’는 의미가 없다. 지금껏 살아오면, ‘나’를 불러 준 수많은 ‘너’가 있었기에, 수많은 ‘우리’가 함께 했기에 지금의 ‘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지금도 그러했듯이 현재의 지금 내 곁에 있는 너와 우리가 너무나 소중하다.




공작하는 재미     

최정연


 ‘사각, 사각’

작은 손에 가위를 들고 그림 테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마분지를 오려 내면 예쁜 종이 인형이 탄생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종이 인형은 참 귀찮은 놀이다. 엄마를 졸라 용돈을 받으면 겨우 한 장을 사기 위해 10분씩은 하염없이 쳐다보면서 고민해야 했다. 이쁘고 탐나는 수많은 그림을 다 사고 싶지만 그럴 순 없으니 선택과 집중의 고뇌를 겪어야만 했고, 동생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억지로 낮잠도 재워야 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종이 인형을 꺼내 들고 하나, 하나 명품 가위질로 오려 냈다. 특히, 공주의 드레스를 자를 때는 숨마저 멈추고 집중해야 했는데,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엔 종이 인형의 어깨에 걸칠 고리까지 잘라버려 망치기 때문이다. 또 의상과 소품은 칸칸이 따로 정리를 잘해야 했는데 그래야 서로 걸려 찢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가위를 들고 공작(工作)놀이를 하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나만의 보물이 생긴 것 같아서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번거롭고 귀찮은 그 일이 그때는 왜 그렇게도 즐거웠을까. 분명한 것은 다른 놀 거리가 없어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집 앞 골목에도 운동장에도 같이 놀 아이들은 있었지만 나는 종이 인형 놀이를 즐겼다. 번거롭고 귀찮아도 내 손을 움직여 무언가 탄생한다는 기쁨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이 되고 살아가는 데 빠져 허우적 거리다 보면 편한 놀 거리를 찾게 된다, 편하려면 즉각적이고 선택도 쉬워야 하며 갈등도 없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미 만들어진 무언가를 사용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돈과 건강만 있으면 갈 곳과 놀 거리가 넘쳐나지만 정작 그리 놀고 나면 항상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딩굴딩굴공작소는 재미난 일을 직접 만든다. 어릴 적 종이 인형 같은 공작 활동은 아니지만,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무엇을 하면 재미나게 살까’를 함께 고민하고 작당한다. 놀 거리를 스스로 찾아내야 하니 만나면 이야기 나누는 것이 다반사이다. 책 읽고 와서 수다 떠는 여인네 남정네(여기 인문학 있네, 남다른 정도 있네), 주제어 하나로 이야기를 이어 가다 간혹 할 거리를 찾으면 함께 시도해 보는 기획 수다 한술더떠, 세상의 획일화된 개념 속에 존재감 없이 편승하기 싫어 나만의 정의를 찾는 사고(思考)뭉치, 소소한 일상을 매월 3일에 글로 남겨보는 작심(作心)3 등 놀 거리를 끊임없이 찾고 만들어낸다.

     

  딩굴딩굴공작소에서 벌어지는 놀이는 결코 화려하거나 세련되지 않으며 편리하지도 못하다. 그러나, 편리함을 뛰어넘는 나의 이야기와 공작하는 재미가 넘쳐나는 곳이다. 어쩌면, 이쁜 상자 속에 공들여 정리해 놓은 나의 보물이었던 종이 인형 같은 존재이지 않을까.




나와 이름  

한성근


내 이름은 한성근(韓成根)이다. ‘나라의 뿌리를 이루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지만 나는 이 이름에서 나라의 뿌리가 교육이라고 생각했고, 교육은 부지불식간에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단어가 되었다. 내 이름의 삼행시는 한결같이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다.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희망을 담았다. 내가 나에게 붙여준 별칭은 ‘평생행운’이다. 평생교육사인 나는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행운과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싶다는 바람을 표현하고 싶어서 쓰고 있다. 남이 나에게 붙여준 별칭이 몇 개있다. 첫째는 ‘푸우‘다 참이슬마을 분들이 붙여준 별칭인데 풍만한 몸과 푸근한 마음이 곰돌이 푸우 같다고 붙여주셨다. 둘째는 DDF에서 붙여준 별칭인데 ’성근별‘이다. 새벽이라는 외로운 시간을 은근히 비추는 빛으로 사람들 옆에 있고 싶다. 넷째는 올해 제주도 워크숍에서 역시 DDF 동지들이 붙여준 별칭이다. ’한결 한성근‘ 선생!, 마치 호와 같이 쓰이는 멋진 별칭이다. 결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나이테와 같이 성장하는 결, 변화하는 결이 멋진 스토리텔링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딩굴딩굴공작소(DDF; Dinggul Dinggul Factory)는 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평생학습공동체 '삶과앎 모두의 평생학습'의 공유공간이자. 일상을 작당하는 실천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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