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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딩굴딩굴공작소 May 03. 2022

[작심(作心)3일] 2편. '업(業)'

매월 3일, 마음에 담아 마음을 담는 DDF 새 프로젝트 작심(作心)3일

교육의 유혹에 내가 선택한 평생교육

한성근


교육은 알 수 없는 이끌림이다. 마치 첫사랑 같은 느낌이다. 다른 이에게 무엇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이 숭고한 활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20대 중학생 전문 보습학원을 운영했다. 학생들과 재미있게 공부했고, 학생들 성적이 오를 때 행복했다. 그런데 졸업한 제자들이 적성과 상관없이 직업을 택하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학생들이 왜 공부를 하는지, 내가 학습지도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찾아왔다.


그래서 교육활동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 보자고 결심하고 30대 중반에 방송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교육학은 너무도 재미있는 학문이었다. 이론과 경험이 만나니 배우는 것이 행복했다. 평생교육개론 과목은 매혹적이었다. 기존의 교육과 다른 학습사회를 알려주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라도 자신이 원하는 학습을 할 수 있고, 그 학습의 성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문장은 나에게 그런 세상을 꿈꾸게 해 주었다. 기회가 된다면 평생교육을 업으로 삼고 싶었다. 평생교육사 자격을 취득하고 비영리민간단체인 평생교육실천협의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2006년 우리 사회는 평생교육에 대해 낯선 시기였고, 이 시기에 시흥시 평생학습축제를 운영하게 된다. 기관 및 단체를 방문하며 평생학습이 축제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게 되었다. 축제의 준비과정은 나와 기관에 평생교육이란 낯섦을 극복하는 과정이 되어 주었다.


2007년에는 평생학습마을 사업을 기획하고, 마을리더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최고의 학습이 마을 회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협의를 통해 한 가지 한 가지 합의해 가는 과정은 배움과 실천의 최고봉이었다. 3년간 다양한 학습활동이 학습동아리 결성으로 이어지면서 동아리 활동이 마을공동체 활성화에 기여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이 경험은 개인이든 지역이든 강점을 발견하고 극대화하면서 내부의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길임을 알게 해 주었다. 평생교육은 공동체를 만드는 효과적인 도구라는 것과 개인의 학습이 마을(지역)과 만날 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들은 살아가는 방향과 방법을 알려주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무엇이 날 행복하게 하는지를, 모든 관계에서의 역할을, 본성과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일에 대한 즐거움을, 일상과 업의 모호함을, 진정성으로 신뢰를 얻어가는 과정을, 배움과 실천의 중요함을, 기도하며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그리고 기타 등등...

          



나의 일거리는 할 거리 찾기          

최정연


사람은 한평생 ‘할 거리’를 찾아 헤매는 존재이다. 태어나서는 살기 위해 엄마 품을 파고들어 먹을거리를 찾고, 제 발로 뛰어다닐 즈음부터는 또래들과 함께 놀 거리를 끊임없이 찾느라 해지는 줄 모른다. 좀 더 크면 미래의 내 직업이 될 무언가를 찾아 준비하고 도전하는데 사람들은 이 행위를 두고 일거리를 찾는다고 표현한다. 시간이 흘러 일거리가 안정되면 즐길 거리를 찾는다. 특히, 일거리는 굉장한 효용 가치를 지니는데 개인적으로는 나의 하루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일상이면서 경제적으로는 나와 가족의 밥벌이가 된다. 또, 사회적으로는 나의 쓰임새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알려진 직업이나 명함이 없으면 간혹 ‘할 일 없는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할 일이 없어 보이는 그 와중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고 또 찾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라는 말은 놀 거리, 즐길 거리, 먹을거리, 살 거리, 챙길 거리와 같이 명사 뒤에 붙거나 어미 ‘~을’ 뒤에 쓰여 내용이 될만한 재료를 나타내는 의존명사이다(네이버 국어사전). 먹고, 놀고, 배우고, 일하고, 즐기는 행위와 맞물려 그렇게 나의 인생이 그럴싸하게 채워지고 있다. 오래전, 앞으로 뭘 하며 살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에게 지인이 던진 물음은 ‘직장이 필요한가, 직업이 필요한가’였다. 이 어려운 질문을 대면하고서야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직장은 돈을 벌고 나의 일거리를 쉽게 내세울 수 있는 효과적인 선택이었지만, 나는 단호히 직업을 택했다(40대 경력단절 여성이 번듯한 새 직장을 찾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니 지레 포기한 것일지도). 물론, 직장과 직업의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엔 무리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의 눈에 여전히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해도 그것이 내 업(業)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기에 마음이 편파적으로 기울었을지도 모른다.     

 

재미난 점은, 사람은 누구나 어느 순간 일거리를 놓아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다시 놀 거리, 먹을거리로 회귀한다는 사실이다. 직장이 아닌 직업이라면, 이 되돌아오는 놀 거리와 먹을거리에서도 처음과는 다르게 즐길 거리를 잘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래서, 나는 평생의 배움을 알리고 지원하는 내 직업을 사랑한다. 의존명사인 ‘거리’가 앞서는 단어를 찾아야만 비로소 완성되듯, 할 거리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일거리인 이 직업을 기꺼이 즐길 생각이다.




업(業)으로서의 나의 사명과 정체성     

전하영


어린 시절에 어른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넌 꿈이 뭐니?”이다. 그러면 성인이 된 나를 상상하며 수많은 꿈을 이야기했다. 꿈의 구체적인 모습은 대부분 직업(職業)과 관련되어 있다.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과학자가 되고 싶어요.” 등등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게 되면 직업을 갖게 된다. 어린 시절 꿈을 이루는 직업이든, 꿈과 비슷한 직업이든, 꿈과 전혀 상관없는 직업이든, 학생 이후의 삶은 직업인이다. 직업이라는 단어는 직(織)과 업(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금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직(織)은 자신이 맡아서 하고 있는 일의 의미이고 업(業)은 자신의 삶에서 이뤄나가는 사명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직(織)은 직장과 연결되고 업(業)은 활동과 연결된다. 직(織)은 무엇을 하느냐에 초점을 두고, 업(業)은 어떻게 하느냐에 초점을 둔다.      


나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막연하게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고, 교육(敎育)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 꿈으로 인해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평생교육사로서의 직업적 정체성을 갖고 가르치는 활동도 하고 있다. 13살에 꾼 꿈으로 인해 성인이 된 이후에도 교육(敎育)과 관련된 일을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과도 같은 삶이라 할 수 있다.     


대학생 시절 짧은 기간이었지만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와 야학 교사로서의 직(織)을 시작으로 석사과정 때 학과 교육조교, 그리고 평생교육사로 첫발을 내디딘 평생학습도시 해운대구와 울산 중구, 이어 울산발전연구원까지 여러 번 직장을 옮겨 다녔지만 업(業)이 바뀌지는 않았다. 40살에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 10년 동안 프리랜서로서 강의, 컨설팅, 연구, 시민단체 활동 등 수많은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지만 업(業)은 여전히 그대로다.      


성인 이후에 직(織)으로서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업(業)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많이 고민하고 살아온 나의 삶은 “배움을 통해 나의 삶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명함 속에 박 직장인으로서의 위치가 아닌 내 삶의 속에 깊이 박힌 나의 사명과 같은 정체성에 오늘도 나를 걸어본다.




"나  꿈꺼떠 기싱꿈꺼떠"

김동희


아주 아주 어릴 적

나의 아침 일상은

늘 이랬다.


4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나

말투는 늘 혀짜래기 소리를 했었고,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불안을 온 마음과 정서에 장착을 한 나는

어둠을 무서워했고

덕분에 밤이면 귀신 꿈에 늘 시달렸었다.


그러나,

늘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상황으로 내 앞에 나타나서

나를 놀래키는 그 귀신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헤치려 하지 않는 거였다.

나에게 뭔가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냥 내가 무서워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난

생각했다.

'그 귀신들에게 물어보자

왜 자꾸 나타나는지...'


그래서

꿈속에서 귀신을 만나면

무슨 일로 그러느냐며

귀신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고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더니

그렇게 무섭던 귀신들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고

친근하게 다가왔고

몇 번의 그런 만남 이후로는

나타나는 빈도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꿈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무섭지 않았다.

또한

내가 귀신 꿈을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로 여기지 않으니 귀신 꿈이라고 따로 분류되지 않게 되고

모든 꿈들이 평준화되어

내게 따로이 귀신 꿈이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시작이었을까?

나는

늘 다른 사람들의 안위를 살피며 모두가 평온하기를 바랐다.


그것은

집안 분위기에서 내가 살아남는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난 땡깡 부리고

떼쓰기보다는

부모님. 형제들이 모두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늘 복종하고 순종적이었었다.

그러한 습성이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어

나는 나의 색을 제대로 내지 못했고 늘 내가 없는 사회관계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너무너무 싫었고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 쳤으나

나는 어딜 가든 언제나 그 상황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내 모습을 거기에 맞추려고

나의 온 의식과 무의식까지도 총출동하는 나를 느낀다.


그러한 나의 기능은

특히 처음 만나는 사람, 처음 가는 장소 등 처음 마주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상황을 파악하여

난 어떤 색의 옷을 입어야 할지

검정이 나을지 흰색이 나을지

빨강이 나을지

무수한 고민 속에

표출되는 나의 다양한 모습들이 난 최근엔 사랑스럽기도 했다.


어릴 적엔

그렇게 눈치 보며

지내는 내가 너무 싫었고,

진짜 나의 색깔이 없는 것 같아서

많이 힘들었지만

돌아보니

그렇게 눈치를 잘 보며

주변 상황에 신속히 대처하며

시시때때 변화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이 나 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술치료 현장에서 혹은

다양한 교육현장에서

참여자들이

최대한 평온하고 안전한 정서 속에 자신을 만나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일을

잘하게 된 것이다.


원인 모를 불안을 가득 안고 태어난 데다

무서운 군인 아버지로부터의 스파르타식 훈육은

나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고  그것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눈치 보는 삶이

이제는

나의 순기능이 되어

어디에서 어떤 대상자를 만나더라도

나의 의식과 무의식의 총출동으로 최상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사람들과 소통하며

정서적 안정으로부터 치유에 이른 길을 안내하는 나의 지금의 일이

결코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그 어린 시절 내 꿈에 자주 나타나 주었던 그 귀신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때 그 귀신들은

실은 나의 불안과 억압에 대한 표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직업이 아닌

업으로서의 일에 대한

나의 가치로움에 대하여

기나긴 시간을 휘리릭 둘러보았다.




나의 업

권창숙


우리의 직업 중 누구나 알 수 있는 직업은 몇 가지나 될까. 현재 한국직업사전에 나타나 있는 직업은 16000개 정도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내가 직업을 말하며 세어본다면 100개도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공무원. 의사, 드론조종사, 물리치료사, 강사 등 아마도 100개는커녕 50개도 어려울 것 같다.


마을의 한 단체장을 맡고 있는 나는 얼마 전 이번에 마을로 새로 오신 동장님을 만나러 주민센터에 갔다. 동장님 취임인사 후 한동안 따로 만나는 일이 없었는데, 며칠 전 계획서 변경 공문건과 회원모집 현수막 요청을 했더니 단체에 대해 궁금해지셨다며 만남을 요청하셨다.


단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현수막의 단어 선정을 보고 궁금해지셨다며, 무슨 일을 하고 있냐고 물으시길래 교육쪽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가끔씩 나는 나의 직업에 대해 물어올 때 당황스럽다. 뭐라고 이야기하지? 1~2초 정도 멈칫한다. 직업으로 이야기하려고 할 때 나의 정체성에 대해 나 역시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강사. 선생님. 상담사.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떤 직업 명칭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직(職)에 해당이 될 것이다. 나와 같이 교육쪽 일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면 업(業)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가진 직업은 한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 나의 직업은 고 3때 정해졌다. 정했다가 아닌 정해졌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건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정한 게 없진 않다. 이과생이었던 나는 합격하고 난 후 1지망에 적었던 수학교육과를 사회교육과(지금 생각하면 아무래도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운명이었나 보다)로 변경했는데 이건 순전히 나의 의사였으며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나는 교사를 그만둔 지 벌써 10년 이상이 훌쩍 지났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정서교육, 소통교육, 독서교육, 진로상담, 직업상담까지.


종종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물을 때 멈칫하게 되는 건 내가 하는 일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떠한 하나의 단어로 나를 표현하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상담을 할 때도 지지상담과 교육상담이 있으며 교육을 할 때도 학습자에 대한 탐색, 그리고 학습자 스스로의 자신에 대한 탐색이 필요하기에 상담도 필요하다. 나를 어느 한 가지의 명칭으로 묶어버리고 싶지 않은 이유이다. 그래서 아직은 나의 일에 대해 교육 관련 또는 교육쪽 일을 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언젠가 나의 정체성을 잘 담고 있는 적절한 단어를 찾아서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자 나의 브랜드가 될 것이다.




딩굴딩굴공작소(DDF; Dinggul Dinggul Factory)는 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평생학습공동체 '삶과앎 모두의 평생학습'의 공유공간이자. 일상을 작당하는 실천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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