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역할 그리고 편견 극복
작년부터 가까워진 커플이 있다. 언니네와 우리는 코로나 시절을 함께 보낸 의리 있는 사이랄까? 부부끼리 가까워진 덕분에 편하게 서로의 집에서 자주 만남을 갖곤 한다. 가까워질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많이 작용했다. 나이도 비슷했고, 직장을 옮기며 미국에 온 것도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달 차이로 미국에 들어왔다. 남편들은 남편들끼리 미국 직장생활의 애로 사항을 나눌 수 있었고, 부인들끼리는 주부생활에 대해서 통하는 얘기들이 많았다. 또, 아직 아기가 없는 것도 서로 편하게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주었다.
어느 날 우리는 서로 부부의 역할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시작은 자동차 운전이었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점이 너무도 많다, ' 중에서도 자동차 1대를 부부가 서로 공유했다. 우리 부부는 자동차 셰어 문제를 가지고 치열하게 싸우곤 했었는데,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자연 종식(?)되었다. 언니네 부부도 차가 1대뿐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문제를 겪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했다.
단 한 번도 자동차 셰어 문제로 싸운 적이 없다는 것이다. 충격이었고 사실은 믿기 힘들었다. 나만의 시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 안 싸울 수가 있지 말도 안 돼..'라고 생각했다. 대화를 좀 더 나누어보았다. 어떻게 안 싸울 수 있는지 비법을 알고자 했다. 비법은 어쩌면 단순했다. 언니네 집에는 각자의 역할이 분명히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해진 역할에 있어서는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전은 언니 담당이므로 항상 언니가 운전했다. 심지어 남편분은 면허도 따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불편하지 않을까? 답답하지 않을까 아니 왜? 이렇게 역할을 나눈 걸까?'
그렇지만 언니네 부부는 시종일관 한결같이 대답했다.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또한 서로에게 그 문제를 가지고 불만도 없다고 했다. 서로에 대한 불만이 없으니 싸움이 없었다. 일어나지조차 않는다.
그분들이 돌아가고 나서 우리 부부는 다시 대토론의 장이 얼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우리 부부가 이상한 건지 우리는 그동안 왜 그렇게 싸웠는지. 결론 없는 밤이 지났다.
또 한 번은 다 같이 나들이를 가기 위해서 우리 차로 함께 이동했다. 잠깐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는데, 그때 문득 우리 집은 같이 이동할 경우에는 항상 남편이 운전했다. 내가 평소에 남편 회사 출퇴근시켜주는데 너무 많이 운전한다고 불평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출퇴근을 제외하고는 항상 남편이 운전을 했고 그것이 어느새 굳어져서 딱히 더 이상 내가 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주유를 기다리면서, 언니네 부부는 주유소에 도착하면 두 명이 동시에 내려서 한 명은 주유구를 열어주고 다른 한 명은 주유 버튼을 누르고 주유를 한다고 했다. 다시 한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왜? 겨울에 주유하려고 내리려면 얼마나 추운데... 왜 언니는?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 추운 날 남편만 주유하러 나가는 우리 집 남편은 어쩐지 좀 불쌍한 걸까?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이상한 걸까? 언니네가 이상한 걸까? 이렇게 이상한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걸까? 내가 스스로 남편은 남편이니까 이렇게 하고, 반면에 나는 아내로서 저렇게 하고 내가 정한 기준에서의 부부 역할을 하지 않는 부부는 이상하게 간주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나의 편견은 굉장히 허들이 낮고 편협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아직은 젊고, 생각이 유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나는 편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누가 하면 어떤가? 저 부부는 싸우지 않는다. 같이 한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다.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바로 부부싸움이다. 언니네 부부는 싸운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서로에게 불만이 없고 그래서 싸움이 안된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 대한 불만이.... 차고 넘쳐.... 아직도 어제 결혼한 신혼처럼 뜨겁게 싸운다. 우리 부부는 정해진 정확한 역할이 없어서 그렇게 자주 싸웠던 걸까? 역할만 나누면 정말 싸우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 부부도 역할을 나눠서 싸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우리는 서로 어떤 역할을 가지고 있는지 또 가지고 싶은지.
놀랍게도 우리 부부도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말만 안 하고 딱딱 정하지 않았을 뿐이지 10의 9번은 내가 하는 일과, 어쩌다 한번 그냥 우연히 남편이 하게 되지만 역시나 대부분 내 역할, 그리고 남편도 당연히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었다. 나 역시도 대부분 남편이 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운전이었다. 함께 외출 시에는 당연히 남편이 운전하는 것.
여기서 내 입장을 추가해보면, 남편은 본인이 운전하는데 불만이 없다. 본인이 하는 게 마음이 더 편하다고 하고, 내가 길치라서 길이라도 몇 번 헤매면 아주 잔소리가 쉬지 않는다. 그래서 초행길은 더욱이 내가 운전할 경우 백퍼 싸우기 때문에 우리는 암묵적으로 남편이 해왔고 하게 되었다. 대신 주유소에서도 생각해보면 나도 대부분 같이 내리는데 다만 빠르게 다시 내리고 탄다. 그 이유는 자동차 안에 그동안 쌓아둔 쓰레기를 버리고, 자동차를 정리하기 위해서다.
남편은 내가 자동차 청소를 맡게 된 이후로 (이것도 암묵적) 자기 자리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 나도 '뭐 이 정도야.' 별 불만 없이 다 내가 정리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렇게 보이지 않는 역할이 있는데 그동안 왜 싸웠던 걸까?
좀 더 심층적으로 우리 부부 분석해보았다. 가끔 발생하는 서로가 그 역할이 하기 싫을 때,! 그때 언쟁이 발생한다. 딱히 역할이라고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어느 날 왜 이건 나만하지?라는 불만이 폭발한다. 그래서 내가 하던 역할이 싫어지고 싸우게 된다. '그동안 나만 이일을 해왔잖아.' 라면서. 그런데 언니네 부부처럼 이건 아예 너의 역할이야 라고 밑줄 쫙- 싫을 때도, 좋을 때도, 아무 생각이 없을 때도, 내 역할이니까 내가 하면 된다. 불만이 생겼다면, 다른 역할들을 찾아보고 다른 일을 서로에게 부여하거나 대화를 하면 된다. 이제 이 롤이 싫어졌으니 우리가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롤을 수정&변경하자고 말이다. 이 단순하고도 간단한 원리를 깨닫지 못해 먼길을 돌아온 것 같기도 하고, 먼길을 헤맸기 때문에 이런 보물 같은 정답을 발견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 사이 역할에 내가 얼마나 많은 편견을 부여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전형적인 남편이 해야 할 역할에 내 남편을, 아내의 역할에 나를.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다 같이 하는 거지.'라고 말했고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집안에서 남편에게 바라는 것도 또 내가 하는 행동도 지극히 틀에 박힌 남편과 아내의 역할에 얽매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로서 내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한 불만이 생길 때마다 우리 부부는 우주 빅뱅이 일어났던 거다.
나는 살림이 때론 하기 싫은데 그건 나의 일이기 때문에 불평불만을 꾹꾹 눌러 담고 해야만 해!라고 참다가 매번 마지막에는 터졌다. 살림도 청소, 빨래, 요리, 설거지 등 많은 분야가 있어 충분히 나눠서 할 수 있다. 아니 나눠해야만 두 사람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 혼자서는 다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도 생각해보면 내가 준 역할에 대해서는 모두 다 잘 수행하는 편인데, 어쩔 때는 내가 시키고 다른 때는 내가 그냥 해버리기 때문에 딱히 남편도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스스로 하지 않는 모습에 내가 또 혼자서 터져버리곤 한 것이다. '왜 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가.'라고 씩씩대면서.
그래서 남편에게 우리도 역할을 좀 더 체계적으로 나눠보자고 했다. 남편도 동의했다. 지금처럼 암묵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너와 나의 역할 분리, 그리고 불만이 생기기 전에 미리 말할 것!
먼저, 주말에는 남편이 한 끼씩 요리를 맡아서 해주고 평일 요리는 내가 하고, 청소 빨래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대신 평소에 그리 피곤하지 않은 평일에는 설거지를 도와주기로 했다. 정리하고 보니 역시나 이미 지금 우리 부부가 이렇게 지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때론 더하고 덜하고의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확실히 이건 너의 역할이니까 해야 해!라는 책임감을 준다면 하기 싫은 날이 찾아와도 이건 나의 일이니까.라는 생각으로 약간의 짜증은 혼자서 승화를 시키면서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부부 사이 어떤 역할도 부부 서로가 만족한다면 상관없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편견에 사로잡혀 '남자가 어떻게 여자가 어떻게?'라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알고 나니 속이 시원했고, 동시에 누구도 내가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부부 사이 수많은 삶의 모습들이 있다. “어느 것 하나 같지 않기에 무엇이든 정답이 될 수 있다!” 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배웠다.
부부 사이 누가 운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