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중년을 건너가는 중입니다 (1)
주말이면 가끔 아이들과 동네 도서관에 들립니다. 도서관에서 제일 먼저 들리는 곳은 어린이실입니다. 저야 일반 자료실로 가고 싶지만, 아이들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어린이실에 먼저 들려야 합니다.
책을 고르는 아이들 뒤를 따라다니며 책들을 윈도 쇼핑하듯 구경합니다. 그러다 보면 가끔 눈길을 끄는 제목의 책도 있고, 그런 책을 발견하면 스윽 꺼내서 넘겨보기도 합니다.
그림책 <구멍>도 그렇게 만났습니다.
<구멍>은 작가 열매 님이 향 출판사에서 2021년에 발간한 책입니다. 지금 제 글을 읽는 여러분도 중년을 건너고 있다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 책의 제목이 왜 눈길을 끄는지 이해되시겠죠? 중년의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허전한 구멍 하나를 갖고 있잖아요.
중년의 쓸쓸함의 시작이 바로 가슴속 구멍을 느끼는 순간이거든요. 그래서 중년들은 이 낯선 구멍을 자꾸 채우려고 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취미를 즐기기도 하고 때로는 게임, 도박, 술과 같은 것과 어울리다가 부작용을 겪기도 하죠.
저 역시 그림책 <구멍>을 집어 들었을 때는 가슴의 허전함을 무언가로 채우려고 애쓰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구멍'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때마침 아이들도 책을 골라서 자리에 앉았길래 저도 옆에 앉아서 책장을 넘겼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땅에 있는 구멍입니다. 구멍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읊조리는 내용이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은 그림책입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계속해서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구멍>의 문장 하나, 하나가 중년인 제 자신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습니다.
<구멍>을 쓴 작가 '열매'님이 중년을 생각하고,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책이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작가님은 아마 아이들에게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각을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년의 한가운데에서 가슴에 구멍을 갖고 사는 저로서는 이 책을 중년스럽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네 글자로 시작한 책은 처음에는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구멍의 답답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멍은 앞만 보며 땅을 걷는 동물들에게 밝히기 일쑤입니다. 구멍은 그렇게 아무도 관심이 없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책에 묘사된 구멍의 모습이 마치 허전함에 휘청거리다 자기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차이고 밝히는 중년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아무도 구멍에 신경을 안 쓰는 것처럼 아무도 중년의 허전함을 돌봐주지 않습니다. 중년 자신조차도 그 구멍을 외면하고 자신이 중년임을 애써 부정합니다.
외면과 부정은 중년을 자꾸 과거에 묶어 둡니다. 중년도 한 때는 앞만 보고 달리는 말처럼 열정적이고, 활력이 넘치던 때가 있었으니 말이죠. 광야를 달리던 내가 지금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구멍이 되었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긴 합니다.
중년은 저 멀리서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바뀌었다고 달리기보다는 "지금 뛰면 내 무릎이 괜찮을까?"라는 걱정이 먼저 드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청춘이 지났음을 인정하고, 내 상태를 이해하고 그에 맞게 새로운 나를 열어가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신호가 바뀐 횡단보도 앞에서도 주춤거려야 하는 중년은 가슴속 '구멍'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림책 <구멍>에 그 답이 있었습니다.
책을 계속 읽어보면,
동물들이 구멍에 와서 더러운 똥을 싸기도 하고, 비가 내려서 차가운 빗물이 고이고 나뭇잎이 쌓여갑니다.
이 장면에서는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함을 견디지 못하고, 온갖 유혹에 시달리며 텅 빈 가슴을 채우는 중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중년의 허전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쇼핑, 알코올, 게임과 같은 것들로 가슴속 허전함을 채우게 되고 이는 '중독'이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집니다. 때로는 사람에게 너무 의지하고 사람으로 가슴을 채우다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책에서 구멍은... "나는 어쩌다 구멍이 되었을까"라고 한탄합니다.
중년 역시 "어쩌다 개 가슴에 구멍이 생겼을까.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날들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늘에서 차가운 비가 내리고 구멍이 빗물로 가득해지면서 구멍의 새로운 가치가 확인됩니다.
빗물이 가득한 구멍은 개미에게는 호수가 됩니다. 하늘을 날던 새들이 바라본 빗물이 가득한 구멍에는 하늘이 담겨 있습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구멍에도 밤이 가득합니다. 아무에게도 쓸모없고, 외면받던 구멍이었는데, 상황에 따라, 이해하는 방법에 따라 구멍은 호수가 될 수도 있고, 세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마지막에서 "나는 온 세상. 나는 구멍"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구멍이 세상이 될 수 있어도 구멍은 구멍이라고 말합니다. 구멍을 극복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살아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구멍>을 읽으면서 중년의 허전함도 결국은 그냥 허전함이 느껴질 뿐이지, 해결할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허전한 상태로 두어도 되는데, 허전함을 채워야 된다는 중압감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책을 다 읽고 타인과 비교해서 내 삶이 의미가 있어야 하고, 중년의 허전함을 극복하고 무언가 대단한 것으로 채워야 한다는 생각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허전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 이해하고, 굳이 억지로 무언가를 채우려 하기보다는 중년의 허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어제처럼 오늘을 묵묵히 살아야겠습니다.
그림책 <구멍>은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에서 중년을 대하는 자세를 배우게 된 특이한 경험이었습니다. 내 가슴속에 '구멍'이 느껴지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