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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의 감촉 Oct 22. 2023

“그래, 회사 다닐거다. 이제 됐냐?”

이제 자비는 끝났습니다. 잔인한 나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2016년 봄이었습니다. 첫째는 한창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고, 2015년 10월 생인 둘째는 이제 한참 엄마 젖을 무는 아기일 때였죠. 어느 날, 친정엄마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정말 그만 다니실거냐고 거듭 물은 후 그럼 내가 회사를 다니고 엄마 아빠가 아이들을 봐주셔도 되냐고 여쭈었습니다. 남편에게도 ‘나 회사 나가도 될까?’했더니 ‘그래그래. 되기만 해. 내가 아이들 보는 거 다 알아서 해줄게.’     


그 말에 왜이리 순진했을까요? 행동력도 빠른 저는 그날로 바로 미용실 가서 머리하고 사진 다시 찍고, 사진을 업데이트한 후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오픈했습니다. 경력직이라서 그 전에도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오는 경우가 많아서 아예 닫아놓은 이력서였습니다. 오픈하자마자 면접 제안이 들어왔고, 면접을 보러 가기 시작했습니다. 테헤란로 빌딩 지하주차장에서 둘째에게 젖을 물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면접을 본 적도 있고, 주말 면접 때는 건물 아래서 울고불고 하는 아들을 남편이 붙들고 저는 계단을 뛰어올라갔고요. 그렇게 여러 곳에서 출근해달라는 소식을 들고 옵니다.     


저는 너무 빨랐고, 참 순진했습니다. 제가 합격 소식을 전하자, 친정엄마는 어렵게 쌓아오신 커리어를 다시 꼭 쥐고 놓고 싶지 않아 하셨고, 자기가 다 알아서 해주겠다던 남편은 난감해 했습니다.     


당장 출근할 수 있다고 면접 때 당당하게 말한 저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엄마 껌딱지에 예민하기 이를 때 없는 아들은 할머니나 아빠가 아니면 새로운 아주머니에게 맡기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들과 돌보미 두 사람 모두에게 생지옥을 주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약속대로 출근하기 어렵다고, 다른 곳에 취업이 되었다는 여러 개의 핑계 문자를 적어놓고 보내기를 누르지 못한 채 몇 시간을 서성였습니다. 판타지처럼 잠시 다른 세상을 맛보았다가 현실로 다시 내던져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현실감을 잃은 채 멍하니 몇 시간을 더 보내고 나서야 문자를 눌렀습니다. 이후의 육아 생활은 열패감에 찌들었다고 할까요? 나는 여기를 벗어날 수 없구나. 하는...     


5가지 사랑의 언어 중 “봉사”의 언어를 가진 남편은 주말에도 쉬지 않습니다. 보통은 기쁘게 설거지며 청소, 밀린 분리수거 등 집안일을 거뜬히 하지만 회사 스트레스가 많은 때면 투덜거리거나 짜증을 내면서 합니다. 그 때도 주중에 많이 혹사하고 또 다음 주도 해야 할 일에 대한 걱정이 많은 때 였나 봅니다. 한숨과 짜증이 번갈아 가는 하루를 보내고 아이들을 재운 후 남편과 마주 앉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새 이야기는 가정 생활에 대한 저의 피해의식과 남편의 피해의식이 뒤엉킨 다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다툼도 지는 법이 없습니다. 때론 당당하게 때론 교묘하게 때론 우회적으로 저의 승리를 이끌어내죠. 뻔한 결말을 말면서, 저도 제가 이런 걸 알기에 싸움으로 가지 않도록 대화 중간중간 등어리도 긁어주고, 마사지도 해주고, 웃긴 얘기도 해주고, 어르고 달랬지만, 참지 못하고 계속 싸움으로 끌고 나간 남편이 잘못인 것이죠. 이제 자비는 끝났습니다. 잔인한 나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래서, 여보는 만약에 일하는 것과 아이들 돌보는 것, 둘 중 하나 선택해야 한다면 뭘 할건데?”     

“.........”     

“대답해 봐”     

“그래, 회사 다닐거다. 이제 됐냐?”     


마음 속에 고요히 부르는 승리의 쾌재! 회사를 못다니는 대신, 아이들 돌보는 삶이 훨씬 어렵고 힘든 과정이라는 것을 남편 입으로, 정확한 어휘로 인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드디어 속이 시원했습니다. 남편은 그 말을 뱉고 쓴 표정을 짓고, 패배감에 젖어들었지만, 그 쓴맛을 딛고 달콤한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1회성 승리가 아닙니다. 자주 이 말을 달콤하게 핥으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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