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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비 Apr 30. 2019

화장이 귀찮다

화장은 귀찮은 일이다. 화장은 하는 것도 지우는 것도 정말 귀찮다. 아침마다 화장하는데 소요될 시간을 고려해 일찍 일어나야 하고 밤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화장을 지우기 위해 세수를 세 번이나 해야 한다.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겨도 화장을 지우고 잘 수 있는 건 이 무서운 습관 덕분이리라.


본격적으로(?) 화장이 귀찮아진 건 지난해 5월이었다. 잠이 많아서 출근시간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던 나는 아침마다 화장하는 게 귀찮다며 투덜댔다. 그러자 한 동료가 안 하면 되지 않냐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말이야 쉽지. ‘민낯이 예쁜 사람’이 아닌 나는 민낯으로 사람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외모를 평가받는 건 일상이었다. 얼굴은 물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에 ‘예쁜 사람’이라는 디폴트가 존재했고,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그것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화장 역시 디폴트에 가까운 사회적 얼굴을 만들어내기 위해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노동이었던 셈이다.


매일 밤 화장을 지우고 거울에 비친 민낯을 보며 생각했다. 과연 내가 예쁘지 않아도 사람들이 날 좋아해줄 수 있을까. 타인의 시선 속에서 외모를 꾸미는 데 강박을 느끼고 인정을 갈망하다 보니 어느새 외모는 자존감의 근원이 되어있었다. 분명 민낯도 나인데 나는 내가 무척 낯설었다.


그러나 내가 화장을 하지 않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곁에 있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는 것이 무례임을 알고, 나와 비슷한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 그들이라면 민낯이든 아니든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에 나는 용기를 내 민낯으로 밖을 나서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민낯을 보고도 평소처럼 대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감을 가졌고 덕분에 타인의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물론 간혹 놀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럴 땐 “내 얼굴이니 네가 적응하라”며 맞받아쳤고 그들 역시 맞는 말이라며 웃어넘겼다.


화장을 하지 않으니 정말 편하다. 아침에 잠을 좀더 잘 수 있고 외출 준비가 무척 간단하다. 얼굴이 화장으로 덮여있지 않아 가볍고, 수시로 거울을 보며 수정화장을 하던 때와 달리 얼굴에 신경을 쓰지 않아 좋다. 더우면 언제든 세수를 할 수 있고 눈이 간지러우면 마음껏 비빌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제 화장은 한 달에 서너 번 정도 기분을 내고 싶을 때 한다. 나조차 낯설던 민낯은 완전히 익숙해져서 꽤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 아무렴 어때. 이게 나인걸. 한 발자국 떨어져 그동안 나를 옥죄던 것들을 바라보니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가를 느낀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나는 자유롭다.


아마 혼자였다면 타인의 시선 속에 갇혀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분노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기에 내 세상이 변할 수 있었다. 내가 곁에 있는 사람들을 믿고 용기를 냈듯 연대하는 우리 모두의 세상이 바뀌길 바라며 오늘도 나는 화장이 귀찮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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