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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Oct 16. 2024

#025(D-76)쓸모없는 일의 쓸모

버려진 정원 돌봄의 즐거움

내가 매일 하고 있는 여러가지 일 중에서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가장 긴장을 안하는지, 그리고 시간을 잊은 채 몰두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요가를 할 때도 물론 긴장을 덜하고 시간이 빨리 가는 편이지만, 그래도 요가를 하면서 내 몸을 알아차린다는건 시간을 잊는다기보다 오히려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온전히 그 시간 그 순간에 머무는 행위이므로 요가가 가장 시간가는 줄 모르는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몇년 전부터 알상에서 내가 발견한, 시간의 흐름을 잊고 몰두하는 일은 혼자 정원을 가꾸는 일이다. 


이 집에 이사온 지 4년째가 되서야 비로소 이 정원일이 나에게 힐링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사온 후 1년은 방치했고, 2년째 봄에 슬글슬금 정원의 흙을 만지고 다듬고 잡초를 뽑고 낙엽을 줍는 일을 시작했다. 즐거움보다 스트레스가 먼저 왔다. 빨리 정돈하고 싶은 욕심에 조바심도 났다. 정원의 상태가 너무 엉망이었기에 치우는데에 정말 많은 시간과 힘이 들었다. 게다가 앞과 옆에  4층 빌라가 벽을 만들고 있는 음지정원이라 햇볕이 들지 않아 심을 수 있는 식물이 제한되어 있고 기껏 정성껏 골라서 심고 보살펴도 성장은 또 어찌나 느린지.. 그것도 속상했다.


가장 화가 났던 것은 왼쪽 옆 빌라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어떤 사람이 4층 창가에서 매일 밤 담배꽁초를 정원 은행나무 아래에 떨어뜨릴 때였다. 며칠만 지나면 허옇게 꽁초들이 쌓이는 것을 발견할때마다 화가 났다. CCTV를 설치할까 밤새 지켜볼까 경고문을 부착해볼까.. 이 중에서 세번째 방법을 두 번이나 써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4층까지 쭉 뻗은 키큰 은행나무 가지들에 잎이 무성해서 그런지 바닥에 떨어지는 꽁초의 수가 조금은 줄어들지만 잎이 다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겨울부터 초봄까지는 꽁초가 그대로 바닥에서 발견되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물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래도 올해는 화가 별로 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래. 계속 피고 던지려무나. 나는 계속 치우겠다. 그리고 꽁초를 아무리 떨어뜨려도 우리 정원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어. 그리고 지금은 돈이 없어 못하고 있지만 조금 여유가 생기면 꽁초 떨어지는 그 공간 위에 뭔가를 설치하고 말거야. 기다려라! 그때까지는 그냥 내버려두자!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고나니 쌓인 꽁초를 봐도 화가 덜 났다.



우리 가족 중에서 이 정원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나 혼자다. 남편은 그동안 한 세 번 나와보았을까? 그것도 내가 여름에 너무 초록이 예뻐서 나오라고 등을 밀어 한번 나와봤었고, 겨울에 눈치우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한번 나와서 도와달라고 했었다. 가을에 은행잎이 꽤 많이 떨어지는데 우리 집 구조가 낙엽을 모아서 마대자루에 몇 개씩 넣어서 다시 집의 반대편 방향으로 실내를 통과해서 현관밖으로 나가야만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특이한 구조여서 지난해인가 내가 손목을 다쳐서 무거운 걸 들지 못할 때 부탁해서 한번 들어준 적이 있다. 그렇지만 관심없는 것도 존중해주기로 하고 서운해하기보다 차라리 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관심을 두고 있고 나만을 위한 이 정원이 있다는 게 얼마나 비밀스럽고 좋은가.




어렸을 때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버지가 내 공책 아래에 학년 반 이름을 볼펜으로 정자로 천천히 써주시곤 했다. 그리고는 언젠가부터 공책 표지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자" 라고 정성들여 쓰셨다. 어릴 때는 이게 무슨 뜻인지도 잘 몰랐다. 성인이 되고 나서 그것도 한참 지나서 문득 아버지는 왜 그 한 문장을 줄곧 공책에 써주셨을까 궁금해졌다. 우리집엔 가훈 따위는 없었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한다고 아버지가 따로 우리들을 불러 훈계하거나 이야기한 적도 거의 없었다. 중요한 건, 그 문장을 열심히 써주기만 했지 단 한번도 그것의 의미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쓸모가 있어야 하는지, 그 쓸모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 앞뒤 설명없이 다소 느닷없는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 문장이 연상될 정도로 아버지의 인생이 '쓸모'와 관계있지도 않았다. 내 짐작엔 어디서 그 문장을 보고 좋다고 생각해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자식들 공책 앞장에 써주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춘기때는 그 말이 싫기도 했다. 왜 맥락없이 이런 말을 써주는 걸까 하는 반항심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우리집 사정은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단 한푼도 생활비를 벌지 못해서(않아서) 엄마 혼자 힘겹게 가정을 이끌어가던 우리집에서 아버지의 쓸모는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사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집을 와보셨을 때 아버지는 이 정원을 보시고 이런 땅에 재배해서 먹을 수 있는 채소나 과일나무를 심지 왜 쓸모없는 풀과 꽃을 심느냐고 하시면서 역시나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이 땅은 해가 들지 않는 음지라 그런 거 키울 수가 없어요).


그렇다. 나는 아무 쓸모없는 이 작은 땅에서 쓸모없는 노동을 하고 있지만 나에겐 그 시간이 쓸모가 없지 않다. 그 시간이 마냥 기다려지고 한번 여기 발을 디디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이 일을 하는 데에는 별다른 계획이나 목표가 없고 또 얼마만큼 해야한다는 의무도 없다. 안해도 아무 문제 없고 일을 많이 한다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푸릇푸릇 식물들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나는 너무나 편안하고 좋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땅에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고 초록잎을 올리고 꽃도 피우는 이 녀석들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보이는 이 땅이 나에겐 하루의 복잡함을 정리해주고 산란한 마음의 조각들을 차분하게 걸러서 가라앉게 해주는 필터같은 준재가 되어준다. 그래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보이는 이 땅이 지금  나에겐 가장 쓸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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