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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May 05. 2022

그늘이어도 괜찮아, 오래 살아남을게

음지식물의 힘: 음지정원

이사와서 1년간 무심히 방치했던 이 공간을 마음 먹고 들여다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한 뼘땅이라고 표현했지만 가로 약 4미터 세로 2.5미터 가량으로 제법 큰 화단엔 나무 세 그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 중 대장은 화단 맨 왼쪽에 위치한 커다란 은행나무였다. 곧게 위로 쭉 뻗어자란 키큰 은행나무 아래에는 몇 해 동안 켜켜이 쌓여있는 은행잎들과 열매들이 잔뜩 널부러져있었다. 어떤 것은 썩어있고 어떤 것은 이미 바싹 말라있었다.  은행나무 앞쪽으로 작은 대추나무 한그루가 왼쪽으로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포즈로 아슬아슬하게 생존해있었다. 나무 가지 몇 개는 이미 말라서 회생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화단의 중앙에는 목련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위쪽으로 뻗은 가지들 중 맞은 편 빌라 벽과 맞닿은 지점의 가지들은 짧아서 다소 불균형한 수형을 지니고 있었다.  원래는 균형잡힌 가지들을 가진 아름다운 수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앞집 창문쪽으로 뻗은 가지들만 잘려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맞은 편 빌라 2층 세대가 가까이 접근하는 나무가지들을 다 꺾어버린 듯한 모양새였다.
 

나무 세 그루 외에는 넓은 흙바닥엔 은행열매가 싹을 틔운 새싹과 잡초들이 듬성듬성 있을 뿐 황무지인 땅이었다. 땅을 파보니 바싹 말라있었다. 이 화단을 어찌할꼬. 내가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막막한 마음에 이 집에 살던 지인에게 전화해서 이 공간에 대해 물어보았다. 지인은 이 화단에 몇 년 간 여러 종류의 식물들을 심어봤지만 단 한 개의 식물도 성공하지 못하고 모두 시들어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식물 키우기는 애초에 포기하고 그저 아이들이 뛰노는 공간으로만 이용했다고 말했다.


두번째로 숲 가드닝을 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봄철 가드닝과 농장일, 그밖에 본업으로 매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그 친구는 2,3주 후 우리 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그 전에 나에게 두 가지 미션을 내려주었다. 첫째, 정원 청소 (흙 위와 아래에 있는 쓰레기까지 제거하기) 둘째, 하루 중 햇빛이 몇 시간이나 어느 지점에 드는지 아침 점심 저녁 나누어 시간대로 체크해서 메모할 것.


먼저 청소 미션을 수행했다.  제멋대로 널려있는 크고 거친 돌들을 한 곳으로 모아 치우고 여기저기 떨어진 쓰레기들을 주웠다. 청소한 땅 밑을 한번 삽으로 파보았더니 뭐가 잔뜩 파묻혀 있어서 파보았더니 파면 팔수록 예상치못한 다른 쓰레기들이 튀어나왔다. 아이들 장난감, 닭뼈다귀, 쇠갈고리, 녹이 잔뜩 슬은 커다란 쇠못, 인형의 팔 다리, 조개껍질, 소라껍질, 구슬, 플라스틱 포크, 빨래 집게, 노끈, 담배갑 비닐, 스티로폼 조각들.  생전 삽질을 해보지 않은 터라 며칠 동안 치운 후엔 팔다리와 허리가 아파서 한동안 일어나기 힘들었다  


두번째 미션은 좀 할 만했다. 이 정원은 맞은 편 빌라와 우리 집 빌라 건물 사이에 위치해있어 하루 중 한낮에도 1시간 이상 길게 햇빛이 내리쬐지 못했다. 그나마 해가 반짝 맑은 날이나 그 정도이지 조금만 흐린 날에는 구름에 가려 하루종일 빛이 들지 않기도 했다.


일조시간과 일조량을 대략 측정해서 친구에게 보내주니, '역시 예상대로 음지정원이구나'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햇빛이 원래 잘 들지도 않는데다가 커다란 은행나무와 목련나무의 잎들에 가려서 그 아래에서는 웬만한 식물들은 성장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음지정원?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적당한 햇빛과 온도, 물이 필요한데 우리집 정원은 음지정원이라 빛을 많이 받지 않아도 잘 자라는 음지식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식물의 세계에 문외한인 나에게 '음지식물'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했다. 햇빛이 충분하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식물들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친구가 추천한 식물은 호스타, 휴케라, 고사리류, 아스틸베(노루오줌) 수국, 크리스마스 로즈, 그리고 빈카같이 노지에서 월동이 가능한 음지식물들이었다.


얼마 후 친구는 커뮤니티 친구들과 함께 가꾸는 공동 정원에서 음지에서 잘 자라는 아기 상태의 라일락 나무와 수국 같은 식물들을 몇 종류 가져왔고 나와 과천 농장에 같이 가서 호스타 몇 종류를 골고루 구해왔다. 올해 하나씩 심어보고  내년까지 살아남는 종을 다시 더 심으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햇빛이 부족해 꽃이 화려한 정원으로 가꾸긴 힘드니 대신 잎사귀가 화려한 (다양한) 음지식물들을 골고루 심고 낡은 벽과 담쟁이를 배경으로 빈티지한 음지정원으로 컨셉을 잡는게 어떠냐고 조언했다.


나는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눈부시고 화려하게 꽃을 피우지는 못하지만, 해가 가려진 그늘에서도 차분하고 꿋꿋하게 자기 존재를 포기하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남는다는 음지식물들로 이루어질 이 정원이 마음에 들었다.

친구는  식물의 세계에 입문한 나를 축하하며 내가 가꿀 정원이니 혼자 시간을 두고 정원 지도를 한번 그려보라고 했다.  정원 지도라니.. 친구는 전문가이고 경험이 많으니  의견을 묻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있지만 내가 스스로 하나씩 해보고 보람을 느끼게끔 배려하고 애써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나는 끙끙대며 정원을 어떻게 나누어 어떻게 심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땅을 고르고 지도 배치대로  식물들의 자리를 잡은  구덩이를 파고 하나씩 식물들을 심었다. 무슨 수업을 받는 기분이었다.


가드너 친구가 처음으로 그려준 가든맵. 왼쪽 아래에 대추나무가 빠져있다
친구의 버전을 기초로 내가 다시 만들어본 정원지도. 이것저것 시도해보려고 메모가 꽉차있다
목련 아래 위치한 호스타, 휴케라, 아스틸베
목련 오른쪽으로 라일락, 수국, 크리스마스 로즈와 빈카 등등


초보 가드너가 조심스레  심은 이 아기 식물들이 과연 건물과 건물 사이로 불어대는 강풍과 냉기, 그리고 충분한 햇빛 없이 그늘 아래에서 자라날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친구는 식물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고, 특히 음지식물들은 정말 강한 아이들이라고 걱정하지 말고 지켜보라고 했다. 처음에 비실비실해보아고 잘 자라지 않더라도 조급하게 물을 자주 주지 말고 이 환경에서 뿌리를 내리고 활착할 수 있도록,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서두르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냥 기다리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내 생애 첫 정원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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