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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규 Dec 25. 2020

주문 좀 할게요

뻑뻑한 삶에 어묵 국물 한 모금


겨울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에는 무엇이 있을까? 

얇아진 달력, 두꺼운 외투, 입김, 첫눈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나는 주로, 포장마차를 지나칠 때, 뜨끈하게 놓여 있는 붕어빵을 보고 ‘아, 이제 겨울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단순히 먹는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추억이 있기 때문에, 길에서 붕어빵이 보이기 시작할 때 겨울을 실감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친구와 함께 집 근처 태권도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태권도장은 수요일마다 ‘레크레이션’ 이라는 것을 했는데, 수업 대신 탱탱볼로 실내 축구를 하거나, 피구를 하며 놀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 다리를 찢고, 어려운 품새 동작을 연습하고 외워야 하는 월화목금의 수업보다 수요일의 레크레이션을, 나와 친구는 더 좋아했다. 


어느 수요일, 우리는 태권도장으로 가고 있었다. 태권도장이 있는 빌딩의 옆 빌딩 앞에는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는데, 붕어빵과 어묵을 팔고 있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초겨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추웠던 것만은 확실하다. 친구는 붕어빵이 먹고 싶다고 했고, 마침 우리는 각자의 용돈이 있었다. 우리는 붕어빵과 어묵 국물을 먹고 마신 뒤 도장에 들어갔다. 그날은 탱탱볼로 축구를 했는데, 친구와 나는 한편이었고, 둘 다 평소보다 훨씬 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레크레이션 전에 먹은 붕어빵 덕분에 축구를 더 잘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며 그 집에서 파는 붕어빵을 ‘레크보신탕’이라 부르기로 했다.


우리는 레크보신탕을 수요일마다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서로 돈이 부족한 날엔 붕어빵을 넉넉히 먹지 못하고 어묵 국물을 더 많이 마셔서 배를 채워야 했지만, 양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붕어빵의 맛보다는, 수요일마다 집에서 일찍 나와, 친구와 함께 레크보신탕을 먹으러 신나게 걸어갈 때의 기분이 더 확실히 기억나는 걸 보면. 


  야, 너 오늘 얼마 있어?

  나 딱 천 원 있는데?

  야, 난 500원 밖에 없어

  그럼 내 거 나눠 줄게. 대신 오늘은 네가 먼저 골키퍼 해라.

  알았어. 야, 빨리 가자. 배고프다


와 같은 대화를 나누며, 도복 바지를 펄럭거리며, 들뜬 표정으로 포장마차로 향하던 설레던 순간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에겐 붕어빵의 맛보다 더 달콤했던 것 같다.


붕어빵에 담긴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어묵에 관한 추억도 생각났다. 내가 열 살쯤일 때, 외삼촌 댁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날은 어른들끼리 놀러 나가시고 중학생인 사촌 누나와 사촌 형, 그리고 나와 내 동생들끼리 집에서 놀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나는 배가 고프다 했고, 우리는 밥을 먹기로 했다. 사촌 형은 집에 있던 어묵탕을 끓여 주었다. 


우리는 바닥에 있는 상 위에 각자의 밥과 어묵탕을 놓았고, 상 가운데에는 김치를 그릇에 담아 놓았다. 모두 상 주변에 둘러앉아 밥을 먹기 시작할 때, 사촌 형이 자기 국그릇에 밥을 전부 말았고, 국그릇과 숟가락을 들고, 거실에서 베란다로 나가는 문(통유리로 된 미닫이문) 앞으로 갔다.


문 앞에 앉은 형은, 바닥에 국그릇과 숟가락을 내려놓고, 문을 살짝 연 뒤, 밥을 먹기 시작했다. 놀란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어묵은 추울 때 밖에서 사 먹는 게 제일 맛있잖아. 찬 바람 맞으면서 먹어야 밖에서 사 먹는 느낌 날 것 같아서”라고 말하면서.


 누나와 내 동생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나는 형의 말과 행동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뭔가…과학적인 것 같기도 하고… 남들과 달라서 특이하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나도 형처럼 먹고 싶었다. 급한 마음에 국그릇에 밥을 말지도 않고 양손에 국그릇과 밥그릇, 그리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고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신속하게 형 옆으로 갔다. 


형은 나에게 젓가락 하나로 어묵을 꿰어 밖에서 먹는 것처럼 먹으면 맛있다고 했고, 나는 형의 말대로 먹었다. 남은 젓가락 하나는 어묵을 꿰어 국물에 담가 놓았다. “그치, 그렇지. 그렇게 하니까 진짜 밖에서 먹는 것 같지?” 형의 칭찬을 들으며, 찬 바람을 맞으며, 나는 내가 진짜 밖에서 어묵을 사 먹고 있다는 착각을 즐기며, 지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어묵을 먹었다.


 남들이 들으면 “별 이상한 경험이네” 하며 웃고 끝날 일화일 텐데, 왜 나는 이 추억들을 떠올리면 가슴 속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걸까?


취업 준비를 하는 지금의 나는, 돈을 벌어야 하는 나는, 먹고 살 걱정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데, 그때의 나는, 친구와 레크보신탕을 먹으러 신나게 걸어가던 나와 굳이 찬 바람을 맞으며 어묵탕을 먹던 나는, 먹고 사는 것은 걱정이 아니라 즐길 거리였기 때문인 건 아닐까? 지금의 나는 잠깐만이라도 그때의 내가 되어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딱딱해진 가슴으로 일과 돈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나에게, 순수함의 농도를 회복할 기회를 제공하고 싶어서.


세월이 흘러도 이 추억들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 떠올린 추억의 광경도 몇 년 뒤에는 몇 줄이 사라지겠지. 그래도 핵심만은 기억해 두자. 추억의 핵심만은.


글을 쓰다가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기정(박소담)은 기우(최우식)의 소개로 부잣집에 미술 과외 선생님으로 들어가게 된다. 기정은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 대학 응용미술학과를 나온 것으로 부잣집을 속인다. 기정과 기우 두 남매가 그 집에 입장하기 전, 말을 맞추기 위해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노래가 기정을 진짜 일리노이 대학 출신 미술 교사로 변하게 하는 마법 주문처럼 느껴졌다.


되고자 하는 대상의 핵심을 담은 문장을 말하면, 잠깐이나마 그 대상이 되는 주문. 나는 레크보신탕과 야외어묵을 먹던 어릴 때의 내가 되어보고 싶다. 조금 신나는 목소리로 나만의 주문을 외워본다.


 “태권도 붕어빵 수요일엔 탱탱볼 베란다 앞 어묵탕 젓가락 한 개”


지금의 내가 순수했던 나로 잠깐이나마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주문이다. 삶이 너무 뻑뻑할 때, 국물이 필요할 때, 예전의 내가 그리울 때, 나는 눈앞에 문을 하나 그려 놓고 위 주문을 외울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는 순수했던 예전의 나로 잠깐이나마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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