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준 작가의 <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고
현대사회는 세계화를 표방하며 초연결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는 인류에게 많은 편익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그 빛이 밝을수록 이면의 그림자 또한 더욱 깊어지고 있다. 작가는 책 서두의 여는 글을 '다양한 생각이 멸종되는 사회'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 제목에 많은 공감을 했다.
책의 내용을 잠시 빌려오자면 주거 건축물 '빌라 사보아(Villa Savoye, 1929)'을 건축한 르 코르뷔지에라는 세계적인 건축가를 조명하고 싶다. 그는 '필로티', '골조와 벽의 기능적 독립', '자유로운 평면', '자유로운 파사드', '옥상정원'으로 구분하는 근대 건축의 5원칙을 주창했다고 한다. 하나씩 되새기며 읽다 보면 단어들이 괜스레 익숙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럴까?
신축빌라를 보면 대부분 필로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덕분에 1층에 주차공간이 생겨 정말 편리하다. 창문도 참 넓다. 특히 일출과 일몰 시간에 강남 한복판의 기라성 같은 빌딩 숲을 보면 장관이다. 온 벽면이 창으로 도배되어 태양을 그대로 삼킨 듯 번쩍인다. 안쪽에서는 넓게 펼쳐진 창을 통해 스카이뷰를 감상할 수 있고, 용도별로 다양한 공간이 칸막이 벽으로 분리되어 있다. 기둥 사이에 자리한 입구는 멋진 건물 전면과 어우러져 마치 입장하는 사람이 VIP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옥상은 넓고 평평해서 루프탑이나 정원으로 활용하기에도 좋다. 요즘 세상을 뒤덮고 있는 건축물의 공통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국제주의 양식'은 건물의 기능과 효율성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의 5원칙과 매우 흡사한 구조로 만들어지고 있다. 작가는 책에서 이 건축가의 주장이 국제주의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건물의 공간과 기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듯한 건축구조와 자본주의는 매우 궁합이 좋다. 자본주의에서 원하는 효율성에 적합한 구조를 이룬다. 르 코르뷔지에의 5원칙은 거장의 이름값과 성공적인 사례라는 양 날개를 달고 세계로 뻗어나갈 만했다. 그렇게 뉴욕과 서울의 땅은 태평양이라는 미지의 바다를 넘어, 과거의 역사가 무색할 만큼 유사한 건축 양식으로 뒤덮이고 있다.
이런 현실은 책에서 끊임없이 내비치는 작가의 의견과 맥락을 달리한다. 작가의 건축관은 인본주의적 관점을 중요시 여기는 것 같아 보인다. 점차 멀어지는 자연과의 거리를 생각하며 안타까워한다. 신체적으로 매우 취약한 인간에게 몸을 의탁할 건물은 필수불가결하다. 안전 확보와 식량저장은 당연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식을 전승하여 종족을 번화하는데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기에 다양성을 매장하는 건축 트렌드의 현실에 더욱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게 아닐까 싶다.
집에는 거주자의 삶이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거리를 보면 똑같이 생긴 빌라와 아파트가 온 시야를 차지한다. 브랜드, 평수, 입지가 다를 뿐이다. 집 내부는 Ctrl+C와 Ctrl+V를 무한 반복한 것처럼 똑같다. 거주자의 취향이 반영될 수 있는 건 인테리어뿐이다. 장판과 벽지의 재질과 색상은 어떻게 할 건지, 베란다는 확장해서 쓸 건지, 가구 배치는 어떻게 할 건지가 전부다. 그럼에도 집이 지어지기도 전에 모델하우스를 방문해서 수억 원짜리 분양 계약을 마친다. 창 밖의 풍경보다는 안쪽의 평수를, 내부의 적합성보다는 바깥의 입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본력이 곧 행복이라는 대원칙이 굳건한 세상에서 한 개인이 이를 배척하기는 쉽지 않다. 단칸방에 몸을 구기며 살아가더라도 다가올 금전적 이익을 상상하며 인내하게 된다. 거대한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획일적으로 나열된 건축물과 시너지를 이루면서 '개성'이라는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훼손하고 있는 현실이다.
책을 읽고 나서 잠시 생각을 해봤다. 나는 건축에 문외한이라 구체적인 방안 같은 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집이라는 공간은 효율성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집에서 자신을 가장 진솔하게 드러낸다. 바깥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립성을 보장받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완전히 나에게 들어맞아야만 한다.
하지만 요즘 지어지는 건물을 보면 이미 위, 아래, 옆 모든 집이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요 가전을 놓을 위치는 물론이고 가구마저 빌트인으로 고정되어 있다. 주방, 거실, 안방, 베란다, 세탁실까지 콘크리트 벽으로 나뉜 각자의 공간에는 기능이 정해져 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주방에는 식탁이, 거실에는 TV와 소파가, 안방에는 침대와 옷장이 자리 잡고 있다. 모두가 원해서라기 보다는 그렇게 구성하지 않으면 왠지 불편하다. 효율성만을 추구한 건축 의도에 의해 삶의 내밀한 공간이 무언의 강요를 받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타인의 삶이 너무 가미된 집도 거부감이 든다. <구해줘 홈즈>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출연진들이 의뢰인의 요구조건에 부합하는 집을 찾아 소개하는 부동산 중개 프로그램이다. 시청하다 보면 건축가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집들이 종종 보인다. 실제로 출연진들도 엄청난 강점인 양 자신 있게 소개한다. 미안하지만 내가 보기엔 대부분 별로였다. 예쁘긴 했지만 그의 라이프 스타일과 개성이 잔뜩 함유된 공간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곳에는 내 삶이 들어갈 여유와 틈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현대식 주거 건물의 표준화는 어쩔 수 없는 타협점이긴 하다. 건축은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과정이다. 한정된 비용과 시간으로 수천만의 인구에게 양질의 주거 공간이 공급되려면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질 필요는 있다. 자신에게 완전히 어울리는 집을 만들고자 한다면 많은 비용을 감당하면 된다.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항상 부유한 사람은 넓고 적합한 공간을 보장받아 왔고, 가난한 사람은 원하지 않는 공간이라도 그저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현대사회는 과거와 달리 크기, 강도, 비용 등 모든 면에서 건축물이 너무 압도적이라는 점이 문제가 아닐까 한다. 거대한 건물들이 모여 이루는 일련의 체계성은 장관이다. 그 안에서 개성을 요구하기에 인간은 너무 작고 연약한 존재다. 표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공허한 외침은 메아리마저 들려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용기를 내기엔 대안이 마땅치 않다. 그렇게 다양성은 표준화에 침식당하고, 개성은 재단되어 틀에 맞추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