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긴 어게인(Begin Again(2013)>을 오랜만에 다시 봤다. 그레타가 <로스트 스타(Lost Stars)>를 부르는 데이브의 공연장을 뛰쳐나와 뉴욕의 밤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마음껏 달리는 엔딩은 다시 봐도 긴 여운을 남기는 장면이다. 그레타가 프로듀서 댄에게 달려가지 않았다는 점이 특히 더 마음에 들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예전에도 <비긴 어게인>이 좋은 엔딩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레타가 왜 데이브의 공연장에서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는지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데이브가 바람피운 것을 여전히 용서하지 못한 것인가 싶다가도, 분명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때는 그 마음이 잘 와 닿지 않았다.
이제는 그레타의 마음을 좀 알 것 같다. 그레타가 공연장을 뛰쳐나가는 모습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레타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해야 한다. 영화가 이어지는 내내 그레타는 자신의 성격을 변함없이 유지한다. 그녀는 (전)남자친구 데이브와 달리 음악으로 스타가 될 생각이 없다. 그저 자신의 즐거움과 자기만족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부른다.
그레타가 바에서 프로듀서 댄과 마주쳤을 때도 그레타는 자기 생각을 분명히 말한다. 음악에 비주얼은 중요하지 않고, 음악 자체의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한 번 성공했던 댄은 그레타의 나이브한 생각에 벙 찌지만 어쨌든 둘은 결국 그레타의 노래를 녹음하게 된다.
하지만 그레타의 음반을 녹음하는 방식은 다른 뮤지션과는 전혀 다르다. 조용한 스튜디오에서 프로 뮤지션들이 집중적으로 녹음하는 것과 달리, 그레타는 뉴욕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건물 옥상에서 주변의 소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녹음하다. 심지어 거리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을 코러스로 섭외한다. 댄의 딸도 거의 즉흥적으로 섭외되어 생각지도 않은 기타 리프를 넣는다.
그레타에게 그녀의 음반은 프로페셔널 뮤지션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라기보다는, 즐거운 놀이에 가깝다. 그녀는 댄의 제안을 받아들여 음반을 만들기는 하지만 자신의 방식을 고집한다. 녹음을 마치고 음반사와 최종 계약을 앞두고는 왜 음반사가 수익의 90%를 가져가냐고 당당하게 묻는다. 계약이 파기될 수도 있는 위험한 질문을 겁 없이 던질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음악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그녀에게 음악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기 위한 것이다. 처음부터 앨범을 내서 히트하겠다는 마음이 별로 없었다. 원하는 게 없으니 두려움도 없다.
이런 그레타이기에 오히려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을 나눈 음악은 돈으로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 데이브가 공연장에서 부른 <로스트 스타>는 그레타가 데이브에게 크리스마스에 선물로 준 곡이다. 둘만으로 너무나 행복하던 시절, 데이브를 위해 만들고, 둘 만의 감정과 추억이 담긴 곡이다.
그런데 데이브는 이 곡을 자신의 새 앨범에 넣었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렀다. 굳이 따지자면 그레타는 이미 데이브에게 곡을 선물로 준 곡이기에, 그 곡으로 무엇을 하든 데이브의 자유다. 데이브가 작곡가를 자기라고 속이며 세상에 내놓을 만큼 쓰레기는 아니다. 이 곡을 음반으로 낸다고 해서 데이브에게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반면 그레타는 오직 둘만을 위해 작곡한 곡을 데이브가 대중 앞에 선보이고 노래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잠깐 바람을 피운 것보다 둘 만의 노래를 세상에 발표했다는 사실이 그레타에게는 더 상처일 수도 있다. 노래가 히트하고, 많은 사랑을 받고,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것은 그레타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로스트 스타>를 만들고, 함께 연주하고 부르면서 확인했던 그레타와 데이브의 사랑, 그 마법 같았던 순간이 이제 모두 사라졌다는 슬픈 사실을 그레타는 확인해 버린 것이다.
그레타와 데이브는 음악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오히려 정반대다. 데이브는 전형적인 락스타의 길을 가려 하지만, 그레타는 히트곡보다 자신만의 색깔을 중요시한다. <비긴 어게인>은 정말 사랑했고, 출중한 뮤지션인 두 사람이 갈라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영화 내내 그레타의 모습을 따라가며 보여준다. 그리하여 영화 마지막에 그레타는 데이브의 공연장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로 했다면 결말은 로맨틱했을지도 모르지만, 영화 내내 이끌어온 캐릭터와 감정, 내적 논리와 스토리를 완전히 배신하는 꼴이 된다. 마음은 아프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다면, 영화 제목처럼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이다. 마지막에 올바른 선택을 하고, 깊은 여운까지 남기는 훌륭한 엔딩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