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한 해를 얼레벌레 보내고 싶지 않다면
12월에 가장 설레는 이벤트로는 크리스마스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1년 내내 설레며 기다리는 날일 수도 있다. 캐롤을 들으며 반짝거리는 전구와 따뜻한 분위기를 상상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후, 혹은 그 당일부터 그 분위기는 싹 사라진다. 그렇게 파티가 끝난 뒤의 헛헛한 분위기 속에서 연말이 가버린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그 헛헛한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2014년 겨울부터 약 4년 동안 운영했던 공간인 상모에서, 매달 2월쯤 '뒷북신년회'라는 파티를 열었다. 연말연초라는 이유로 만날 사람들을 다 만나고 난 후에 모여서 각자 지난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하고, 올 한 해는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파티였다. 항상 마지막 프로그램으로는 1년 후의 나에게 편지를 썼다. 시간이 남으면 그 편지지 뒷면은 롤링페이퍼가 되어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말을 썼는지는 1년 뒤에 읽을 수 있었다. 파티의 호스트인 나는 그 편지들을 모아 1년 동안 보관하고 있다가 다음 뒷북신년회 즈음 나눠주었다.
상모를 운영하는 동안에는 이 '뒷북신년회' 파티가 나의 연말연초 리추얼이었다. 상모가 사라진 후에는 나 혼자만의 리추얼을 만들고 있다. 해를 보내면 보낼수록 정리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만큼 연말연초에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이 왠지 좋다. 그래서 휴가를 길게 내고도 여행을 가지 않고 집에서 올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내다보는 시간을 가진다.
나의 연말 리추얼 카테고리로는 크게 5가지가 있다.
1. Personal
2. Work
3. Money
4. Fortune
5. Love
기록(일기, 블로그, 노션) 읽기
나는 기록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기록은 일기, 블로그, 노션으로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일기를 써온지는 15년이 넘었는데, 작년까지는 나 혼자만의 숙제처럼 1~2달을 밀리다가 며칠을 날 잡아서 몰아 쓰는 방식으로 일기를 썼다. 기억에 의존해서 쓰다 보니 주로 내가 한 일 자체만 쓰게 되었는데, 어느샌가부터 그 작업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감사일기, 3줄 일기 등 여러 방식을 시도해보았고, 현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과 명상을 한 후, 전날의 일기를 쓰는 식으로 일기를 쓰고 있다. 모닝페이지라고 부르기도 하던데, 모닝페이지라고 해서 거창할 것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예전에 비해서 좋은 점은 당장의 고민이나 감정을 생생하게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예전에 비해 쓰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서, 내년의 다이어리는 한 페이지에 일주일을 기록할 수 있는 다이어리가 아니라, 하루를 기록할 수 있는 다이어리를 구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몰스킨 데일리 다이어리를 구매했다.
블로그는 일기의 지면에 담기에는 너무 길거나 깊은 이야기를 담는다. 여행과 같이 유독 강렬했던 일상을 사진과 함께 담을 때도 있고, 격해진 감정을 줄줄줄 써 내려갈 때도 있고,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요즘의 화두들이 어느 정도 문장으로 정리되면 그것을 내놓아보기도 한다. 올해는 바쁘기도 했고, 일기의 용도를 바꾸고 인스타그램에 긴 글을 쓰는 시도를 해보다 보니 블로그에는 글을 많이 쓰지 않았다.
노션은 계획을 위한 기록을 할 때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한 주 동안 해야 하는 일, 한 주를 보낸 소감 한 줄 평, 나의 한 달은 어땠는지, 다음 한 달은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해서 매일매일 기록해왔다.
하루의 기록이 쌓이면 일주일의 기록이 되고, 일주일의 기록이 쌓이면 한 달의 기록이 되고, 한 달의 기록이 쌓이면 일 년의 기록이 된다. 이 기록들을 다시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잊을 뻔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new) 사진첩과 외장하드 정리
외장하드는 작년에 큰맘 먹고 정리했는데,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대학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외장하드 정리는 학기가 끝날 때마다 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올해는 사진첩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언젠가부터 사진을 찍기만 하고 정리하지 않게 되어서 휴대폰에 있는 온갖 스크린샷은 필요에 따라서 정리하거나 삭제하고, 연도별로 폴더를 나눠서 구글포토에 정리할 생각이다.
(new) 1년 그래프 그리기
인생그래프를 그려본 적은 있지만, 1년에 대한 그래프를 그려본 적은 없다.
행복했던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을 여러 번 겪고 보니, 내가 주로 어떤 상황에서 힘들어하고, 어떤 일을 해야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 나오는지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1년 그래프를 그리며 이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려고 한다.
기록(노션/노트) 읽기
회사에서의 일 또한 마찬가지로 노션에 기록해두었기 때문에 이 기록을 읽는다. 올해부터는 동료들과 함께 매 달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연말에 회고하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올해는 회사에서 동료들과 프로젝트 리뷰 시간도 가졌는데, 이 시간도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다.
월별로 했던 업무와 인상 깊었던 일 쓰기
기록을 읽으며 월별로 했던 업무와 인상 깊었던 일을 한 번에 볼 수 있게 한 페이지에 정리한다. 그럼 시간이 지나 몇 년 전의 내가 회사에서 어떤 업무를 했는지 궁금할 때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경력기술서 업데이트하기
위 두 과정을 거치면, 내가 했던 구체적인 업무들에 대해서 카테고라이징이 가능해진다. 카테고라이징한 업무를 성과와 함께 경력기술서에 작성한다. 경력기술서의 업무와 성과를 연도별로 정리할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전인 완성본을 만들기 전까지 필요한 데이터라고 생각하면 좋다.
기록(가계부/포트폴리오) 읽기
가계부를 각 잡고 쓰기 시작한 것은 2017년부터다. 그때 우연히 경제교육협동조합 푸른살림 박미정 대표님을 알게 되어, 상모에서 가계부 스터디를 했다.
요즘은 휴대폰 어플을 통해 자동으로 소비내역을 확인할 수도 있지만, 나는 직접 카드내역을 보며 수기로 노트에 한번 작성한 후, 이를 엑셀에 옮겨적고 있다. 가계부를 쓸 때 중요한 포인트는, 나만의 카테고리를 만드는 것이다. 밥을 먹는 데에 지출한 비용을 '식비'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 친구를 만나서 밥을 먹는 데에 지출한 비용은 '사회활동비'로 분류하고, 혼자 밥을 먹는 데에 지출한 비용은 '생활비'로 분류한다. 이러한 분류 작업은 어플이 자동으로 해줄 수 없기 때문에 직접 분류한다.
올해 주식과 코인으로 투자다운 투자를 하기 시작하며, 포트폴리오에 대한 기록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매달 포트폴리오 정리도 하고 있다.
가계부와 포트폴리오에 대한 소감과 다짐 쓰기
월별 기록이 쌓이면 이렇게 한눈에 나의 현금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월별 지출현황 시트와 현금흐름 연간현황표를 보면 어떤 지출이 만족스러웠고 어떤 지출이 아쉬웠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내년에는 어떻게 가계부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나가고 싶은지 생각할 수 있다.
새해 소비예산 짜기
돈이야 당연히 많이 벌고 적게 쓰는 게 좋다. 하지만 어떻게 많이 벌고 어떻게 적게 쓸 것인지를 고민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대책 없는 압박에만 시달리기 마련이다. 올해 나만의 카테고리에서 예상보다 적게 쓴 부분도 있고, 많이 쓴 부분도 있을 것이다. 소감과 다짐을 반영해서 각 카테고리에 대한 예산을 책정한다.
별자리/타로/사주/신점 운세 읽기
나는 주체성 있는 삶을 동경하는 한편, 결정론적인 것들도 참 좋아한다. 요즘 사주나 신점을 K-상담소라고 하던데! 별자리 운세는 이시이유카리 블로그를, 타로는 엔젤타로 유튜브를 본다. 잘 맞기도 하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도 있어 한 주를 시작하며 보기도 하고, 힘들 때나 잠이 오지 않을 때 보기도 한다. 이시이유카리는 매년 신년운세를 각 별자리마다 올려주는데,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올해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시 읽어보고 맞는 부분이 있었는지 비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신년운세 보기
사주나 신점은 그때그때 주변에서 추천받아서 보러 가는데, 혼자 간다. 이번에는 압구정에 있는 재미난조각가 카페를 방문했는데, 겸사겸사 압구정 나들이도 하고, 나 자신과의 데이트를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new) 소중한 사람에게 편지 쓰기
간단한 편지는 매년 시무식 때 회사 동료들에게 연말정산 노트와 함께 전달하고는 했는데, 얼마 전 소중한 사람에게 꽤 긴 편지를 쓰며 요 근래에는 편지를 정말 안 썼구나 생각했다. 편지를 쓰다 보니 상대방에 대한 감사하고 소중한 마음도 오히려 더 생겨나는 나 자신을 보며, 앞으로는 더 자주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사람에게 달력이나 연말정산 노트 선물하기
요즘 연말정산, 연말결산 관련 콘텐츠들이 보편화되었는데, 데이오프라는 팀은 2015년부터 연말정산 노트 펀딩 프로젝트를 해왔다. 나는 2017년부터 꾸준히 펀딩에 참여해서 친구들과 함께 노트의 질문에 답변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연말 선물로 나눠주기도 한다.
올해는 을지로에서 활동하는 덕화맨숀, 남해에서 활동하는 키토부의 달력을 구매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엄마 생일 축하해주기
엄마의 생일은 1월 1일이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나눠먹고 자는 것이 사실 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끄트머리의 연말 루틴이다. 이것까지 하면 한 해가 정말 정말 간다. 엄마 덕분에 나는 항상 연말과 연초를 축하할 수 있어서, 나는 엄마의 생일이 1월 1일인 게 좋다.
쓰고 보니 정말 많기도 하고, 한 해 동안 쌓아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대부분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부담스러워서 뒤로 가기를 누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도 어느 시점부터 이 모든 것을 했던 것이 아니라, 한 해 한 해를 보내며 이렇게 해보기도 하고, 저렇게 해보기도 하면서 만들어낸 요즘의 루틴이다. 이 중에 하나라도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가볍게 시도해보며 연말을 보내면 좋겠다. 얼마 남지 않은 연말이 부담이라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뒷북OOO'을 만들어서 그냥 그런대로.
이 글을 읽는 모두들! 해피 뉴 이어!
새해 관련한 콘텐츠까지 추천하고, 진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