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식, 상견례 말고 그냥 먹고 싶을때...
대한민국에서 '한정식'이라고 불리는 형태의 식당은 그 입지가 여러 모로 미묘하다. 결혼 전 상견례나 어르신 생신잔치, 혹은 비즈니스 모임 등 사교를 위해 방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순전히 먹기 위해' 한정식집을 찾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 아마 20대 사회 초년생이 한정식집에서 혼밥을 한다면 십중팔구 신기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2인분부터가 주문 하한선이라 애초에 혼밥이 어렵기도 하다.
그런데 나이가 든 탓인지...ㅠㅠ 종종 손이 많이 가고 정갈한 밥상을 받고 싶어질 때가 있다. 집밥이 먹고 싶을때 백반집을 찾는다면 한정식은 그 상위호환이라고 해야 할까. 직딩 생활을 때려친 이후 거의 갈 일이 없었던 한정식집을 최근에 두번 가봤다. 한번은 취재 때문이었고, 또 한번은 남편과 모처럼 근사한 식사를 해보려고 새로 오픈한 집에 가본 것. 우선 첫번째 집은 청계산 입구에 자리잡은 보현재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연잎발효 보리굴비와 연잎밥이다. 문을 일찍 닫는 편이고 예상치 않게 영업을 하지 않는 날도 많으니 사전에 전화확인은 필수. 연잎밥이 나오는 집 중에는 종종 냉동제품을 사와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곳은 다른 가게에 납품도 한다. 막 들어섰을 때도 직원들이 생 연잎을 가득 놓고 손질하는 중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16가지 밑반찬이 열을 맞춰 차려졌다. 전반적으로 나물 위주에 간이 슴슴한 것이 특징.
보자기마냥 곱게 싼 연잎을 헤치자 이렇게 생긴 밥이 드러난다. 찹쌀밥에 연근, 단호박, 대추, 아몬드, 호두, 연자육, 호박씨, 검은콩......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고명이 올라와 있다. 양념장을 따로 주기는 하는데 굳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고소한 풍미가 입안에서 터진다. 꼭꼭 씹어 먹다 보면 왠지 건강한 한끼를 먹는 느낌이다. 한정식에 백반 아닌 연잎밥은 다소 겉도는 느낌이라는 이들도 있는데, 영양밥을 좋아라 하는 나로서는 만족스러웠다. 꽤 많이 먹은 것 같은데도 신기하게 속이 편했다.
https://place.map.kakao.com/10377646
두번째 맛집은 최근 창동 씨드큐브에 오픈한 거궁이다. 이 가게는 이천시에 본점을 두고 있으며 서울에도 몇 곳이 영업 중이라고 한다. 쌀로 유명한 고장답게 이천에는 솥밥이나 한정식 같은 맛집들이 많다. 조선 후기에 쓰여진 농서 행포지(1852년)에는 “이천에서 생산한 쌀이 좋다”는 기록이 나온다. 성종 임금이 할아버지인 세종릉에 성묘했을 때 이천쌀 맛에 반해 진상미가 됐다는 기록도 있다. 오늘날 생산량으로 보면 이천쌀의 생산량은 1% 가량으로 많은 비중은 아닌데, '임금님표 쌀'이라고 해서 산지를 속이는 경우도 꽤 많다고...
주말이면 웨이팅을 해야 할 정도로 북적거리는 거궁 창동점은 주로 가족단위 손님이 많이 찾는다. 유기 그릇에 밑반찬이 나오는데 검은콩조림, 멸치볶음, 메추리알조림, 궁채나물, 취나물 등등....육전과 샐러드, 들깨탕 등도 있다. 아무래도 메인 반찬을 돋보이기 위해서인지 간은 세지 않은 편이다. 곁들여 나온 된장찌개가 생각보다 감칠맛나고 맛있어서 자꾸 먹게 됐다. 밥은 솥밥으로 남은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다. 황태 고추장구이와 보쌈수육이 메인인데 우리는 이날 LA갈비를 추가로 시켰다. 1인당 만팔천원으로 크게 부담스럽지 않고, 어르신들을 고려해서인지 기름진 반찬들은 배제한 느낌이 들었다. 반찬이 워낙 많다보니 온 가족이 와도 골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남편도 이 가격이면 꽤 만족스럽다고 한다.
기본적인 상차림+가격표.
추가 메뉴도 다양하다. 여기에 후식 아이스크림, 커피도 가져다 먹을 수 있어 나름 가성비가 괜찮은 듯 하다.
https://place.map.kakao.com/1430861740
다시 한정식 이야기로 돌아가서, 한정식이라는 용어는 광복 이후에 임의적으로 붙어진 이름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 뿌리는 구한말 안순환이라는 인물이 1903년 개업한 명월관이라는 요릿집에 있다. 일제가 조선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릴 목적으로 행한 조치 중 하나가 인력 감축이다. 왕을 모시던 상궁과 궁녀, 내관들은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이들은 궁에서 먹던 음식들을 일반 대중에게 선보였는데, 이들의 요리가 곧 요릿집 주안상 메뉴가 된다. 안순환이 대령숙수 출신이었다는 루머도 돌았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식 밥상차림은 '한 상에 한번에'가 기본이다. 이런 공식을 깨고 한정식집에 처음으로 서양식 코스요리를 도입한 이가 바로 개성 한정식 '용수산'의 최상옥 1대 사장이다. 그는 "음식은 금방 만들어 먹는 게 맛있다"는 시아버지의 취향에 따라 순서대로 음식을 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통 한식에도 코스 개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계김치연구소는 2019년, 조선시대 식단에도 코스가 있었다는 자료를 찾아냈다. 자료를 작성한 주인공은 1880년대 최초의 미국 대사로 우리나라 땅을 밟은 조지 포크라는 외교관이다. 그는 1884년 삼남이라고 불리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지를 여행하며 지방 관아에서 음식 대접을 받았다. 포크가 받은 상에는 예비 상차림과 본 상차림이 있었으며, 시간차를 두고 음식을 제공했다고 한다. 전통주에 과일류와 계란, 떡, 면류를 곁들인 간단한 주안상이 먼저 나오고 밥과 국, 김치, 고기, 생선 등은 본상차림이다.
아쉽게도 식민 통치와 전쟁 등 파란 많은 역사를 겪으면서 우리나라의 미시사를 탐구할 자료들은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특히 형태가 남지 않는 음식의 경우 옛 모습을 복원하기가 훨씬 어렵다. 한 미국인이 당시의 상차림, 식사 모습, 메뉴 등을 묘사한 기록은 조선 음식사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처럼 한정식의 참모습을 차근차근 탐색하고 나면 한정식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사람들도 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