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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첫 순간과 마지막이 함께하는 산부인과 병동일기

by 김지만

기피부서를 선택할 때,

나는 '산부인과'를 선택했었다.


나에게 모성간호학이 너무 어려운 학문이었고,

어머니 뿐만 아니라 태아 또한 연결지어서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다.

그리고 실습을 할 때에도 제왕절개, 자연분만을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힘들었다.

솔직히 공부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했고,

이런 학문 지식으로 산부인과로 들어가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해외로 갈 수도 있으므로,

중환자실, 응급실 이런 특수 파트를 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곳에 갔다면 한 달 만에 나왔을 것이다. 장담한다.)


다행인건지, 불행인건지,

특수파트보다는 병동에 배치되었고,


도망치려고 발악하는 나에게 신이 장난을 내린 건지,

결국 나는 산부인과 간호사가 되었고,

환자 13~15명을 받아야 하는 어엿한 간호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산부인과는 아이가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고, 항암치료를 받다가 임종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삶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산부인과 병동은 외과 성형외과 안과 등 수많은 타과들이 오는 곳이기도 했다.

저출산 기조에 맞게 3차 대학병원은 산부인과 그 자체로서의 환자들을 받기에는 수요가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일을 하면서, 환자 13~15명을 담당했는데, 항상 산부인과 환자 뿐만 아니라, 내과 외과 안과 성형외과 등 다른 질환을 가진 환자들을 많이 보았다.



간호사는 대략 10주동안 프리셉터에게 도제식으로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근무 여건 상 프리셉터는 본인의 일을 하면서 교육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프리셉티에게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적이다.


배정된 프리셉터에게 빠르게 산부인과의 프로토콜을 듣는데,

첫 주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게 정녕 내가 학부 때 배운 내용들이 맞는건지,

그 배운 내용들이 다 리셋되고,

정말 기술적인 내용들 위주였다.


핵심적인 행위들은 기본으로 하고,

거기서 루틴한 업무들, 항암을 준비하는 과정, 수액에 따른 다양한 수액세트들, 수혈 보고 방식,

환자의 식사, 의사 처방 확인, 약물 준비 등등

내가 학부 때는 배우지 못한 수많은 병원 내 지침들을 짧은 시간 내에 배워야 했다.


워낙 스파르타, 하드코어이신 선생님을 만나서

짧은 시간동안 정말 벅찰 정도로 많이 배우고, 배운 내용을 소화시키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지만,

꾸역꾸역 버텨나갔다.


자그마한 실수들도 했다.

그 때마다 수간호사 선생님께 불려가서 면담을 하고,

왜 내가 이랬는지, 집에서 울면서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실수한 나에게도 죄책감이 드는데,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도 병원에서의 순간들을 떠올려서 기록해야 하는 그 상황들이 고통스러웠다.


실습을 할 때는 경험하기 어려운 내가 담당하는 환자들에 대한 책임감도 느꼈고,

임종을 앞둔 환자를 보고 난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병원 문을 나서면 바깥 세상은 어색할만큼 밝고 활기차서, 그 괴리감에 가만히 벤치에 앉아있다가 집에 돌아간 적도 많다.


집에서 바로 출근하기가 무서워

출근하기 1시간 전에 미리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출근을 하고,

병원 내부 손님용 의자에 10분동안 멍때리며 앉아있다가, 출근했다.

이게 루틴으로 굳어져 거의 1년 내내 이렇게 했다.

업무가 익숙해지고 나서도 항상 1시간 일찍 출근해서 항상 긴장한 상태로 업무를 준비했다.


대학생활 5년 동안 내가 교환학생을 갔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바디프로필을 찍었고, 장학금을 받았다는 그런 과거는 점차 희미해졌다. 그건 내 인생에서나 큰 이벤트였지, 병원 안에서 살고있는 모든 직업군에게 그런 이벤트는 관심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병원은 이 환자가 여러 간호사와 의사와 다른 보이지 않는 의료진들의 손을 거쳐 퇴원하는 것. 그것이 가장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연하게도, 영어를 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몸을 빨리 움직이는 사람. 발표를 잘 하는 사람보다, 주사를 잘 놓는 사람이 더 귀했다.


집에 와서 내가 잘한 내용과 실수한 내용들을 적자니, 2시간이 걸렸고,

대부분 내가 실수한 내용이 태반이었다.

내가 간호사가 될 자질이 있나 라는 생각에 절망하기도 하고,

그동안 대학생활을 알차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이건 병원이라는 환경 앞에서는 다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에 허망함이 들기도 했다.


병원에서의 스트레스와 실수들을 집에 가지고 와서 되뇌이다가, 점점 움츠러들었다.


_

나와 전혀 안 맞을 것 같았던 업무도,

계속 깨지고 부딪히고 하다보니까

제 모양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첫 직장을 간호사로 시작하면서 다행인 점은,

내 안의 오만함과 거만함을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내가 꽤 잘 살았다고 잘한다고

속으로 으스대는 경향이 있었다.

첫 직장을 거치면서 그 생각은 무참히 깨졌고,

나는 그냥 열심히 산 사람이고, 그게 세상을 바꾸거나 누군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또 하나 다행인 점은,

스물네살의 시기부터 어떤 일이든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

의기양양하게 살아가던 사람도, 언제든 부정적인 일이 생길 수 있고,

힘든 순간을 보내는 사람도, 언제든 전화위복으로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의 변화를 이길 수 없고, 흙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무던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느꼈다.

오프가 있는 날에는 꼭 밖에 나가거나, 3일 휴가가 있을 때는 무조건 제주도에 내려갔다.

한달에 3번을 간 적도 있었다.

그 때 가족들에게 간호를 받으면서 지냈고, 다시 올라와 힘든 순간들을 버텨나갔다.



_


그렇게 1년 여의 시간동안

셀 수 없이 많은 환자들에게 주사를 놓고, 수혈을 하고, 항암 치료를 돕고,

혈압을 재고, 체온을 재고, 수술을 보내고, 수술 후 처치를 돕고, 퇴원을 보내고, 임종을 지켜봤다.


환자들은 모두 여성 분들이었고,

지속적으로 항암치료를 하시는 분들 중에서는,

내가 신규임을 아는 분들도 계셨다.


조금 실수하더라도, 괜찮다고 웃으면서 끄덕거려주시는 중년 여성분들, 할머니들 덕분에

일이 갑자기 몰려들어서 울고 싶어도,

아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하면서 벌떡 일어나서 일을 쳐냈다.



처음에는 어려웠던 입퇴원 환자 간호도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할 수 있었고,

점점 선배들과도 친해지기도 했다.


여전히 어려운 선배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뒤에서 나의 실수를 잘 커버해준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환자들에게 5번 칭찬간호사상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첫 직장을 과감히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다음글에 밝히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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