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19개국을 여행했다. 그중 대학시절, 생각하지 못한 좋은 기회들 덕분에 여러 나라를 다녀올 수 있었다. 오늘은 그 여행의 포문을 열어준 제주도의 행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1.
중학교 여름방학 숙제로 제주국제관악제 관람 후 보고서 작성하기가 있었다. 국내, 해외의 유명한 관악단들을 제주도로 초청하여 관악 연주를 하는 행사였다. 거진 2주 동안 진행되는 꽤 큰 행사여서 많은 관악단들이 참여했고, 탑동광장, 천지연폭포 광장, 문화회관 등에서 공연을 했다. 당시 15살의 나는 탑동의 야외공연장으로 자주 갔었다. 그곳에는 직원 분들도 계셨지만, 주황색 티를 입고 현장 관리를 하시는 내 또래의 분들도 많았다. 알고 보니 문화 봉사활동의 차원으로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관악제를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 매력적이었고, 그런 생각을 보고서 말미에 적었던 기억이 난다.
2.
대학생의 첫여름방학.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학 공지사항을 보고 있는데 국제 관악제의 봉사활동 단원 모집 공고가 떴다. 6년 전의 느낌이 새록새록 기억났다. 별거 아닌 토익 점수와 지원서를 제출했다. 나는 무전기를 들며 공연장을 오가는 '현장관리'를 지원했는데, 주최 측의 판단으로 관악단 단체를 모시는(?) 영어 통역/의전 팀에 들어갔다. 통역이라니. 의전이라니. 제주도는 외국인들이 많이 살지만, 그들과 직접 부대끼며 영어로 솰라솰라 이야기하는 건 20살의 나에겐 너무 벅찬 업무라고 느껴졌다. 처음엔 주최 측에 연락하여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지만, 결국 활동비를 준다는 어른의 논리로 설득당해 맡은 업무를 계속하기로 했다.
그 해 여름, 20살의 나는 싱가포르 관악단 사람들을 공항 의전을 하고,여기저기 공연을 다니며 통역을 했고, 공연 전후로 그들과 맛집을 다니며 제주도를 관광했다. 싱가포르 또한 섬이어서 그런지 '싱'(싱가포르를 줄여서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과 이곳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용담해안도로에서 해산물을 맛보고, 탑동 바닷가, 동문시장을 방문했다. 내 또래의 관악단 친구들과 각 나라의 슬랭, 비속어를 말하며(...) 어떻게 하면 더 기깔나게 발음할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국적만 다를 뿐 노는 방식, 대화방식 모두 비슷했어서 그런지 여러 작은 소동 (가령 연주자가 창문 밖에만집중하다가 값비싼 악기를 버스에 두고 내려서, 공연 직전 다시 버스 기사에게 연락을 돌렸던 사건이라던가...)도 있었지만 초기의 불안함과는 달리 생각보다 충만하게 활동을 마쳤다. 처음이어서 그런지 내가 가진 에너지 그 이상을 썼던 것 같아서 약간 벅차긴 했지만 말이다.
공연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제주공항에서 지휘자와 매니저가 "See you in Sing!"을 말하며 해주었던 따뜻한 포옹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지금도 종종 페이스북에서 그들의 소식을 접하는데 다들 잘 지내고 있는 듯싶다.
2.
그래서 그랬을까. 그 충만감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서 그다음 연도에도 관악제 통역 봉사를 신청했다. 21살. 이번에 맡은 통역/의전 팀은 스페인 관악단 팀이었다. 처음에는 작년만큼의 지나친 에너지를 쏟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싱가포르팀보다 더한 파워풀한 에너지에 나도 넘어가버렸다.
천지연 폭포, 바닷가, 맛집, 주상절리 등 나도 제대로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이들과 함께 다니고, 통역을 했다. 오후 8시에 시작되는 공연이었는데, 오전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그들과 함께 붙어 관광을 하고 통역을 하고 공연을 보조하며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원래 내가 하는 일은 관악단의 통역 그리고 이들의 올바른 의전, 그게 다였다. 관악단 연주 이전에 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고 제주도를 가이드하는 일은 사실 내 역할이 아니었어서 솔직히 벅찬 적도 많았고, 주최 측과도 이점에 대해 논의했던 적도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이들에게 기여를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면 내 시간을 써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스페인 팀 또한 제주도의 여러 공연장을 다니며 공연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은 서귀포에서 해녀들과 함께 하는 관악단 연주였다. 스페인에서부터 대한민국의 아리랑과 해녀노래를 준비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관악단 연주가 끝나고 한 제주도의 신문기자가 지휘자와 인터뷰를 원한다고 했다. 통역 담당이었던 나를 통해 기사를 적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를 뿌듯함이 커졌는데, 한편으로는 나의 통역실력의 민낯이 드러날까봐 부끄럽고 쑥스러운 마음도 너무 컸다. 아무튼 이때의 모든 추억들은 아직까지 너무 강렬해서 이들에게 받은 스페인 관악단 검은 티셔츠는 지금도 내 여름 잠옷이다. 크크.
4.
그 행사를 기점으로 외국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꽤 많이 바뀌었다. 그전에는 그저 독해지문을 읽고, 문제의 답을 찾는 형식의 외국어학습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 낯선 외국인들과 만나 서로 살아온 궤적을 공유하려면 소통수단인 '외국어'가 반드시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한국 저 반대편에서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너무나 재미있었다! 언젠가 나도 싱가포르, 스페인에 한 번 더 방문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학교에서 진행하는 외국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해외 유튜브 영상, 영어 원서 등등을 하나라도 더 보려고 의식했다. 공강 시간 버스에서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은 내가 더 많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덕분에 지나칠 수 있을 기회들을 붙잡을 수 있었다.
이 봉사활동의 나비효과로, 대학생활동안 교환학생, 인턴십, 해외봉사활동 등 여러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15개국을 다녀올 수 있었고, 이때의 경험들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SSUL: 7월의 어느날, 성산일출봉을 오르는데 폭염주의보 문자가 삐용삐용 오자,스페인 연주자들은 북한이 침입한 줄 알고 나를 토끼눈으로 바라보며 대피장소를 물었다. (그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