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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만 Oct 20. 2024

2. 수능 끝, 소주 대신 도서관으로.



2025년도 수능도 벌써 25일 남았네요. 수능 이후로도 20대에 몇 번의 시험을 더 치렀지만, 수능만큼 긴장했던 순간은 손에 꼽습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인생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길 바랐던 수능이 끝나고, 제 앞에 주어진 선택지는 서울의 모 대학 통계학과와 제주도 대학의 간호학과였습니다. 이제 지방쥐의 삶을 청산하나 했는데, 해당 대학 통계학과의 커리큘럼을 보던 저는 숫자의 향연에 어질 해져 결국, 제주도에서 4년의 생활을 더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등록금도 한몫했습니다.)


 어쨌든 수능은 끝났고, 놀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밀린 웹툰과 드라마를 보고, 친구들과 여행도 다녀오고, 먹고 싶은 음식도 한껏 먹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1월 말, 친구와 함께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보다가 ‘이대로 입학하다간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수능이 끝난 자를 막을 사람은 없었고, 밤낮이 바뀐 상태에서 놀고는 있지만, 가슴 한편이 답답한 게 해야 할 일을 자꾸 뒤로 미루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능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으니 적응 안 돼서 그러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도 손가락 지문이 국가기관에 등록된 주민등록증을 가진 어엿한 성인인데, ‘지금부터는 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살고 싶은지 생각하자니 머리가 아파졌고, 바뀐 것 없이 여전히 놀았습니다. 그렇게 친구들과 여행도 다녀오고,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수능 이전에는 간절히도 바랬던 순간들이었는데, 노는 것도 시들해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사실 제가 숫자를 싫어해서 제주도 대학을 선택했다는 건 여러 이유 중 일부입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공감을 잘 느끼는 편이어서 간호학과가 잘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고백하자면, 19년 동안 같은 지역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타지로 가는 게 두려운 마음이 들었고, 결정적으로 '간호학과는 안정적이어서 괜찮다더라'라는 어른들의 입김이 대학 선택의 이유였습니다.

 네, 지금 생각하면 그 두려움은 감정일 뿐이고, 주변 어른들의 말이 정답도 아닌데, 그때는 아직 어렸습니다. 대학 OT를 기다리며 놀긴 노는데, 입학한다는 게 실감 나지도 않고,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학교와 학과, 교수님 다 좋았지만, 연배가 있으신 어른들의 의견만 듣고 미래를 선택하는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앞자리 숫자 하나가 바뀌는 게 뭐 별일이냐 싶겠냐마는, 그때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학생이 아니라 성인이라는 생각은 이전에는 없던 책임감이라는 감각을 불러냈습니다. 인생에 대한 책임감. 지금이 저를 바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때까지 저는 영어 단어는 곧잘 외웠지만,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게 뭔지, 선택의 순간에서 제 마음은 어디로 향해있는지, 소신 있게 말하는 것에 무지한 상태였습니다. 12년 간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그리 특출 나지도 않았고, 주변 환경에 조용하게 묻어갔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좋다, 나쁘다’로 판가름할 순 없지만, 입을 닫고 1,2,3,4,5번 중 맞는 것을 고르는 문제와 씨름하는 시간에서 제발 벗어나서, 이제는 주인의식을 갖고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늘려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노트와 펜을 들고 고3 여름방학 때 줄기차게 갔던 탐라도서관 자유열람실에 갔습니다. 자리에 앉아 고등학교 때 쓰던 몇 장 안 남은 노트를 펼쳐 20대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었습니다. ‘해외여행, 교환학생, 아르바이트’ 등등… 이런,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고 싶은지 정보가 부족했습니다. 저의 20대 버킷리스트에 도움을 줄 여러 참고자료들을 찾았습니다.

새로 바꾼 핸드폰으로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대학생활 칼럼 을 읽고, 블로그나 유튜브, 책으로 30대가 된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읽고, 수능을 준비하면서 도움이 된 강사의 동기부여 영상을 다시 보면서 4년의 대학생활을 '주도적으로' 보내는 작전을 짜기 시작합니다.



가장 도움이 되었던 점은 1년 뒤 제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2017년 1월 1일의 김지만에게,

지만아 안녕? 나는 2016년의 김지만이야. 잘 살아있니?
지금쯤 너는 15kg 빼서 다이어트도 정말 성공하고, 과탑으로 장학금을 받을 거고,
지금 이 맘 때쯤은 즐거운 마음으로 해외에서 영어공부 중일 거야~
(이하생략)
성인으로서의 첫 번째 해를 무사히 잘 보낸 네가 너무 대견해~
앞으로도 우리 친하게 지내보자! ㅎㅎ



7줄 정도의 손 편지를 쓰면서 1년 뒤의 저에게 안부인사를 묻고, 목표도 적으면서 제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은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소름 돋게도 위의 모든 일들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를 직면하는 법을 모른 상태로 그동안 살아왔지만,  그 겨울 대화를 통해 제가 얼마나 감수성이 있고, 삶에 애착을 갖고 살고 싶어 하며, 따뜻한 사람인지 19년이 지나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긴 채, 고등학교의 졸업식을 치르고 20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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