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한 달 동안은 정신없었다. 한 달에 3번은 놀러 가던 제주시청과 중앙여고, 제원사거리는 제주도 1020세대의 핫플레이스였다. 과팅도 여러 번 해보고 새벽 2시까지 술게임도 해봤지만, 정확히 한 달 반 만에 술게임, 술, 노래방에 흥미가 떨어졌다. 그저 노는 장소가 맛집에서 술집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기들과 함께 소주병을 일렬로 줄지어 마시는 것도 너무 재밌었지만, 나는 2월 도서관에서 했던 나와의 약속이 더 중요했다. 집중할 게 필요했다. 그게 아니면 제주를 선택한 나의 이유가 희미해질 것이 뻔했다.
재미있는 무언가를 찾을 때까지 나를 준비시켜 보자고 생각했다. 대학 입학 전, 10대 시절 수동적인 자세로 수능을 위한 공부만 했다면,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안될 것 같았던 경험에도 망설임 없이 지원해 보자고 생각했다. 이 제주라는 섬에서 돈 덜 들고, 최상의 경험을 여러 가지 하려면 내가 속한 조직에서 최대한의 아웃풋을 뽑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공지사항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국립대이고 ‘평화의 섬’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여러 가지 국제 관계를 맺어 학생들에게 지원을 해주는 단계였고, 지원방향은 해외 경험부터 인턴, 교환학생, 각종 지원사업 등 정말 다양했다. 지원사업 대상 학생들을 선정할 때 가장 우선순위는 학점이었다. 내가 재밌어하는 것을 학교의 도움을 받아서 하려면 학점이 있어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4월 대학의 첫 시험을 앞두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술집이 아니라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산을 깎아 만들어졌고, 중앙도서관은 가파른 산의 거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정문에 가까운 단과대학에서 산꼭대기의 중앙도서관까지 매일 걸어 올라갔다.
대학교 공부는 고등학교 공부와 달랐다. 학원도 없었고 교수의 2시간 강의 속에서 시험에 나올 걸 머릿속으로 유추해야 했다. 과목도 여러 개였고 너무 방향이 달라서 애를 먹었다. 일주일 동안 들입다 암기도 해보고, ‘이걸 고등학생 때 했으면 성적이 더 올랐겠다’라고 생각하면서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고, 밤 12시에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도서관 버스를 탔다.
대학 1학년은 아무 생각 없이 놀아야 한다는 선배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심심할 때마다 학교 공지사항을 살펴봤다. 매일매일 이렇게 루틴을 잡아가다 보니 오히려 재밌었다. 몰입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았다는 사실에, 이 지식이 나의 교양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더 몰입하고 싶어졌다. 도서관에서 모르는 분야를 알아가는 것도, 1 열람실 창가 쪽 테이블을 내 단골 자리라고 생각하고 아침 일찍 도서관 출석하는 것도, 쉬고 싶을 때 서가를 걸으면서 책냄새를 맡는 것도 재밌었다.
1학년 1학기를 마쳤다.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20살 내가 직접 성취해 낸 결과이자 보상이었다. 나는 재밌어서 공부를 했는데, 돈도 주다니 앞으로도 못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성취감이라는 감정은 아주 달콤해서 나를 계속 붕 뜨게 했고, 동기를 부여했다. 물론 학년이 높아질수록 장학금을 받기는 더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차곡차곡 내가 가닿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를 마음껏 꿈꾸었고, 학교는 그에 대한 보답을 해주었다.
시간이 지나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학교 포털사이트 ‘하영드리미’를 보다가 5년간의 장학금 수령 내역을 보았다. 외부장학금 이외에도 오로지 학교에서만 받은 장학금은 자그마치 1200만 원이었다.
돌이켜 보면 학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요즘도 동기들을 만나면 ‘나도 그때 놀 걸 그랬다!’ 라며 약간의 후회가 담긴 말을 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내가 20살의 나를 하루의 중심에 두고, 나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실천했다는 것이었다. 그 수단이 학점, 여행, 미팅, 자산관리 뭐든 상관없었다. 거기에 내 진심이 조금이라도 들어가고 몰입할 수만 있다면 이미 성장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Tip: 제주시 1020의 대학로는 제주시청, 중앙여고, 제원사거리다. (2024 현재는 조금 다를 수 있음. 댓글로 알려주길 바람)
*Tip: 학교 공지사항을 매주마다 확인하는 버릇을 들인다면, 생각보다 많은 경험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