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매 Jul 17. 2021

나의 첫 기억들

세 살부터 열 살까지

내 생애 첫 기억은 세 살 때다. 25년간 살았던 고향집에 막 이사 갔을 무렵인데, 당시 그림이 취미였던 엄마는 거실 벽에 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젤에 놓인 캔버스 앞에 엄마는 유화물감을 든 채 앉아있었고, 나는 엄마 다리에 앉혀있었다. 그렇게 엄마에게 안겨있던 것이 내 인생의 첫 기억이다. 두 번째 기억은 5살 때다. 유치원에 갔는데, 친구들이 너무 말을 안 듣고 떠들어서 선생님이 화가 났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너희들 자꾸 떠들면 선생님 가버릴 거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친구들은 계속 떠들었고, 선생님은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선생님을 찾으며 하나둘 울기 시작했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선생님 직장이 여긴데, 우리를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따뜻한 위로 대신 “선생님 그냥 가신 척하신 거야. 곧 돌아올 거야”라고 말했다. 지금 떠올려도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6살 때 집에 누워 ‘가나다라’를 쓰던 기억, 7살 때 유치원에서 뺄셈 문제를 죄다 틀렸던 기억, 8살 때 학교에서 날 괴롭히던 남자애들에게 같은 학교 5학년이었던 오빠가 “니 우리 동생 한 번만 더 괴롭히면 죽는다”하고 갔던 기억도 있다. 그렇지만 단순히 떠오르는 것 말고, 마음에 남아 있는 그다음 기억은 9살 때다. 애착 인형 ‘구피’를 잃어버리고 3일 밤낮을 울던 때였는데, 엄마는 한때 내가 좋아했던 ‘재롱이’라는 인형을 건네며 재롱이와 함께 자라고 했다. 나는 구피가 필요했다. 재롱이를 밀쳐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고 자지도 않았다. 재롱이는 밤새 내 머리맡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미안하면서도 미안함 때문에 재롱이를 좋아하진 못했다. 지금도 고향집에 있는 재롱이를 볼 때면 그때가 생각나서 미안하다. 그날 밤 그렇게 혼자 둔 게 미안하다.


10살 때는 두 가지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 두 명씩 짝지어 앉는 것이 아니라 6명씩 모둠으로 앉았는데, 한 학기 내내 어떤 남자아이와 계속 같은 모둠이 됐다. 자연스레 친해졌고 그 친구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나서서 도와줬다. 한 번은 당시 유행했던 졸라맨이 그려진 일기장을 쓰는 나에게 어떤 애가 “그런 일기장은 남자애들이 쓰는 거 아니야?”라고 놀렸다. 그때 그 친구가 “이걸 왜 남자애만 써? 아닌데?”라며 내 편을 들어줬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떤 감정을 느꼈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그 상황이 생각나서 슬며시 웃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게 ‘좋아한다’는 감정인가?”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친구를 좋아하는 감정이 아닌 다른 방향의 ‘좋아함’을 느꼈던 순간이다.


10 때의  다른 기억 하나는 아빠, 엄마와 남해로 휴가를 갔던 때다. 아빠가 캠핑과 여행을 좋아해서 시간이 나면 우리 가족은 여행을 떠났다.   여름엔 남해 바닷가로 놀러 갔다. 엄마는 해변에 앉아있고 아빠와 나는 바닷가에서 튜브를 타고 놀았다. 허기가 져서 해변에 앉아 점심으로 짜장면을 시켰는데, 나는  전까지만 해도 짜장면  그릇을  먹지 못했고, 짜장면에 대한 감흥도 없었다. 근데 물놀이를 하고 나서인지 짜장면  그릇을 단숨에 해치웠다. 정말 맛있었다.  뒤로 짜장면은 나의 최애 음식  하나가 됐다. 


11살 때부터는 비교적 많은 기억들이 난다. 다 소중하지만 어느 정도는 반복적인 기억들이기도 하다. 친구를 사귀고, 공부하고 시험 치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만나고, 짜장면처럼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분류하며 취향을 만들어가는 비슷한 과정의 기억들이다.


한 달만에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그간 글을 올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있었음에도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쓰다만 짧은 글들도 브런치 ‘작가의 서랍’ 속에 갇혀있다. 오늘은 정말로 글을 써보자 다짐하고, 그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쓸까 하다가 갑자기 ‘재롱이’가 생각나서 이 글을 시작했다.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지 모르겠고, 정리되지 않은 글이지만 쓰기라도 한 것에 만족한다. 그런데 글을 쓰며 오랜 기억들을 더듬다 보니 왠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아주 차분해졌다. 

작가의 이전글 조금 섭섭한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