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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이름 Jan 13. 2023

쉬운 출산도 없다

둘째는 누가 그냥 낳는다고 했던가? 무통도 비껴간 출산

출산은 매번 힘들다. 둘째를 낳아본 내 결론이다.


둘째를 가졌다는 이야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째는 진통도 짧고 그냥 나온대.” ”힘을 한두 번 주면 그냥 나와요. 언니! “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진짜 나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첫째는 낳아봤지만 둘째는 나도 처음이니까. 하지만 그 말 사이에 내가 놓친 것이 있다는 있다는 사실을 분만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게 됐다.


뱃속에 아이가 36주 4일이 되던 날 정기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다. 이틀 전부터 아주 약간 피 비침이 있어서 예약한 날보다 당긴 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은 이미 많이 진행이 됐다며 “바로 입원하세요. 빨리 낳고 저녁 드셔야죠”라고 했다. 혹시나 싶어 싸 온 출산 가방을 끌고 올라가 입원을 했지만 바로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출산하던 날 쓴 세줄일기. “마흔 두살 출산 완주기”라는 제목으로 생각날 때마다 메모처럼 쓰고 있다.

병원에 함께 온 첫째 때문이었다. 내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개학을 하루 앞두고 있던 첫째를 언니에게 맡기고 인수인계를 해야만 했다. 방학숙제 해 둔 것을 챙기고 입을 옷과 가방, 좋아하는 반찬과 학원스케줄을 빼곡히 적은 종이를 전하고 나서 유도분만을 시작해 달라고 간호사 선생님을 불렀다.


서서히 진통이 시작됐다. 유도분만을 하면 바로 아이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간격은 점점 짧아졌지만 생각만큼 자궁이 빨리 열리지 않았고 양수를 터트린 후에야 진짜 분만이 이뤄졌다. 진통이 시작될 무렵 달아놨던 무통주사는 아이가 점점 아래로 내려오고 본격적으로 힘을 줄 타이밍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미친 듯이 배가 아팠다. 첫째를 낳을 때 무통 없이 쌩으로 겪었던 그 고통이 그제야 생각났다. 첫째 때는 지금보다 더 작은 도시의 병원에서 출산을 했는데, 마취과 의사가 있는 평일 일과시간에만 무통주사가 가능했었다. 그런데 아이가 그 시간에만 나올 리 없었고 나는 하필 일요일 새벽에 진통이 왔더랬다.


손으로 내 속을 박박 긁어내는 듯한 진통. 그보다 더 힘든 것은 힘을 주는 일이었다. 간호사 선생님의 진두지휘 아래 진통이 시작되면 “끄응-”의 백배쯤 되는 힘을 아랫배에 주어야 하는데 이때 이를 꽉 깨물거나 크게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 출산 후에 이와 목이 상하기 때문이다. 대신 두 손을 허벅지 아래에 끼고 진통이 올 때


“히이임!!!!!”


“히이임!!!!!”을 주어서 아이를 밀어내야 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그렇게 힘을 주면서 거의 다 됐다는 말을 백번쯤 듣고 나면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고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된다.


이때 알았다. “둘째는 힘을 한두 번 주면 그냥 나와요. “라는 그 말에서 내가 놓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설사 한두 번 힘을 주면 아기가 나온다고는 해도 그 ‘힘’을 주는 것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다는 것, 또 무통주사가 커버해 줄 수 없는 고통이 ‘힘’ 한두 번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첫째보다 덜 힘들 뿐이지 출산은 모든 관절과 뼈 마디마디가 늘어나는 과정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정말 “이러다 죽겠다.” 아니 “이렇게 고통받느니 차라리 쓰러지거나 죽는 게 낫겠다.”싶은 순간에 아기가 나왔다. 첫째 때는 이 고통 끝에 울려 퍼지는 아이 울음에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면 둘째 때는 아프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의 착각이었다는 사실에, 어마어마한 고통과 이 고통을 그저 나 혼자 오롯이 견디어 내야 한다는 외로움에 눈물이 났다.


이 고통을 그저 나 혼자 오롯이 견디어 내야 한다는 외로움에 눈물이 났다.

내가 아이를 낳은 병원은 ‘젠틀버스’를 하는 곳이었다. 젠틀버스는 가족분만실에서 진통과 분만이 이뤄지고 아이를 낳으면 즉시 기다렸던 아빠가 탯줄을 자르고 간단하게 첫 목욕을 시킨다. 무통주사와 함께 이 탄생의 감동을 느끼기 위해 78km,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병원을 찾아온 것이었다(물론 고위험군 임산부였기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대도시 큰 병원을 다닌 게 주된 이유지만).


그런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상상했던 감동은 개뿔. 다들 신이 나서 목욕을 시키고 축하해 주는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나에게는 그저 끝났다는 안도만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산후 처치를 하고 나니 오한과 배고픔이 밀려왔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담요를 한 장 덮고 병실로 올랐다. 병실에는 저녁식사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식지 않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천천히 떠 넣었지만 이상하게 속은 텅 빈 것 같았다.


5시 17분에 출산을 하고 7시가 되기 전에 저녁을 먹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뱃속에서 콩콩 거리며 뛰던 소리가 안 들리니 얼떨떨하기도 하고 아직 가시지 않은 통증과 출혈로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은 내 몸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잠시 출산 소식을 여기저기 전하고 눈을 감고 누웠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아직은 팽- 도는 느낌이 나서 첫 면회를 건너뛰었다. 돌아눕기도 힘들어 같은 자세로 한참을 누워 있다가 남편이 찍어온 아기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출산은 경력직이라도 매번 어렵구나. 하긴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놓는 일인데 간단하거나 쉽다면 그것도 서운할 것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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