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EK Miyoung Jan 08. 2024

지난여름, 산에게

엄마의 마음

 의사가 몸을 돌려 병실 밖을 나서자마자 우리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수간호사가 내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녀는 의사의 날선문장들의 귀퉁이를 잘라내어 남들이 듣기에 무리가 없는 유연한 문장으로 다듬어 내게 다시 전했다. 이러나저러나 같은 말이었다. 부드럽게 문장을 둥글린다 해서 그 뜻이 달라질 리 없었다. 나는 담당의를 바꿔달라 부탁했다. 그 요청이 내가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요구였다. 오후가 되어 바뀐 담당의로부터 초음파 검진을 받았다.  아이는 주수에 맞게 차곡차곡 영글고 있었다. 진료실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언니가 함께 초음파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오전에 들었던 의사의 유산 권유는, 시가 친가 할 것 없이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내 상태가 그렇게도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양쪽 집안 모두 가늠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초음파 진료 후 의사는 역시나 무척이나 무미건조한, 오히려 오전에 만났던 담당의보다 한층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조기양막파수... 이경우는 일주일 내로, 길게는 열흘 내로 판가름이 납니다." 

내 양수는 벌써 3주 넘게 새고 있었다.  

"버티실 모양이니 우선 지켜봅시다."

말을 마치고 의사는 고개를 돌렸다. 이 의사 역시 여기서 내 임신은 종료될 거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직감할 수 있었다. 더는 안될 거라는 의사와 열심히 자라고 있는 뱃속 아이를 번갈아 보며, 언니 역시 내게 무어라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말했다. 

다음날 오전회진 시간, 나는 어제 초음파로 봤던 내 상태에 대해 의사로부터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말을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환자라면 으레 그러하듯이. 나는 내 양수가 일반적인 임산부와 비교하여 몇 % 정도 남아있다 말할 수 있을지 물었다. 내 질문에 의사는 별 대답 없이 병실 밖을 나섰다. 그러고는 딱 한마디를 툭 던지고 사라졌다.

"... 거의 없다 보시면 됩니다."


 나는 그 길로 수간호사를 호출하여 전원*(다른 병원으로 옮겨가는 것)을 부탁했다. 병실에 풀어뒀던 짐을 다시 바리바리 챙겼다. 며칠 사이 병실에는  온갖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엄마와 언니가 먹으라고 가져다 둔 간식과 튀르키예에서부터 챙겨 온 갖가지 짐들이었다. 나는 다시 구급차에 올라타 그곳으로부터 7분 거리에 있는 대학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다. 


 응급실은 그야말로 난장이었다. 곳곳에서 소리치는 환자와 보호자가 뒤섞였고 의료진들 역시 목소리를 드높여야만 대화가 진행되는 공간이었다. 응급실에는 보호자가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는 원칙 탓에 엄마가 좁은 침상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자리는 협소했다. 커튼과 같은 얇은 천으로 간신히 갈라둔 구역마다 큰 목소리로 통화를 하는 사람, 소변줄을 꽂느라 소리치는 환자의 비명, 간호사에게 너는 뭐고 의사는 어디 있냐는 막돼먹은 고성이 들려왔다. 그곳이 주중 한낮의 응급실이었다. 나는 환자복으로 환복을 하고 기초적인 검사를 받은 후 응급실 한구석에 있는 초음파 기기로 임신 상태를 살폈다. 역시나 양수가 거의 없다 했다. 아이가 살 수 있겠냐, 의료진을 향해 물었다. 살리려고 여기 온 것이지 않느냐, 의료진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렇다. 나는 너를 살리고 싶어 그곳에 갔다.


 산부인과 병동으로 입원하기 위해서는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 검사만 꼬박 6시간이 걸렸다. 앞서 두 차례의 검사에서 코로나 검사 결과가 ‘알 수 없음’으로 떴기 때문이다. 코로나 검사 결과가 명확하지 않은 한 입원할 수 없다. 세 번째 코로나 검사를 해야 할 때는 발끝에서부터 치미는 짜증을 참을 길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만약 세 번째 검사에서 혹여나 양성으로 나온다면 나는 또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 걱정이 천근만근이었다. 

엄마는 얼마 전 넘어져 척추에 금이 간 탓에 허리 보호대를 찬 채로 앉아있었다. 얼굴엔 세상 온갖 근심은 다 안은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아이 잘못되더라도, 더 아이 갖지 말아라. 김서방한테 이혼당해도 좋다. 아이 갖지 말아라."   

엄마의 삶의 반은 언니 남은 반은 나다. 그만큼 자식의 존재가 세상의 전부인 사람이 엄마였다. 나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결혼도, 출산도 고려하지 않던 삶을 살았다. 창작 활동에 욕심이 많았던 나에게 책임질 존재를 낳는다는 것은 무리이자 욕심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생 아이 둘을 세상 사는 낙으로 살아온 엄마에게 내 생각이 먹힐 리가 없었다. 남편은 없어도 아이는 있어야 한다 했다. 그랬던 엄마였다. 유산 후 내가 다신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울었던 엄마였다. 그랬던 엄마가 아이를 갖지 말라고 말했다. 


 밖은 이미 해가 저물고 그때까지 이렇다 할 식사도 못한 채로 누워있었다. 엄마는 지난 병원에서 싸들고 온 짐들을 헤집어, 기어이 먹을거리를 찾아냈다. 짐 속에는 빵과 귤이 있었다. 엄마는 열심히 내 입에 귤과 빵을 말 집어넣었다. 나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뭐든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열심히 입을 벌려 음식을 삼켰다. 

 저녁 6시가 넘어서 코로나 검사 결과 음성이 떴다. 그제야 6층 병동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나는 너무 피로해 병실로 옮겨지던 순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엄마는 점점이 내 시야에서 멀어졌을 것이고 엄마는 그 어떤 때보다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서있었을 것이다. 기억나진 않지만 머릿속에 충분히 그려질 수 있는 풍경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난여름, 산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