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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 Miyoung Jan 07. 2024

지난여름, 산에게

유산을 권유받다.

 의사가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단 한마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의사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의사가 다녀간 후 내 마음은 활활 타오르는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차갑게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허망함 뒤편으로 괜스러운 승부욕이 불타오를 지경이었다. 분명한 건 내가 생각했던 한국행은 이런 결과를 낳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3일 전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때. 한국의 봄이 어떠한 지, 잠깐의 여유도 느낄 새가 없었다. 비행기 기체를 나오자마자 휠체어에 몸을 실었고, 공항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설 구급차로 바로 올려졌다. 남편과는 공항에서 언제가 될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다음을 기약한 채 헤어졌다. 남편은 그 길로 다시 튀르키예로 돌아가야만 했다. 가족들에게 한국에 들어갈 것을 알렸을 때, 수도권 병원으로 갈지 아니면 친정 근처 부산에 있는 병원으로 갈지 한참을 논의했다. 여러 고민 끝에 부산으로 향하기로 한 건, 서울에서 내 옆을 지킬 보호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급차 측에 내 상태를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들에게 최우선은 나를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부산에 도착하게 하는 것이므로, 차는 빠르게 차들 틈새를 파고들어 남쪽으로 향했다. 무척 피곤했지만 좌우로 요동치는 차 안 작은 침대 위에서 잠을 청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배를 붙잡고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외듯 우리를 안심시켰다. 잔잔하게 느껴지는 태동이 바람 앞 등불처럼 꺼질 것 같아 무척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4시간을 조금 넘겨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는 부모님이 이미 와 계셨다. 구급차 창 너머로 걱정 가득한 두 얼굴이 빼꼼히 보였다. 1년여 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반갑다 하기 뭣하지만 그래도 인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주 보며 대화 한마디를 꺼내기 전에 나는 다급히 응급실로 옮겨졌고 순식간에 겉옷이 풀어져 여러 검사를 받기 시작했다. 병실 밖에서 부모님은 내 입원 수속을 밟았다.

 일순간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정확히 말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내 증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안심되는 일이라는 것이 실감되었기 때문이다. 피를 뽑고 코로나 검사를 하고 수축 검사를 했다. 곧이어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사무적인 태도로 내 상태를 살폈다. 또렷하게 보이는 초음파 모니터가 새삼 신기했다. 튀르키예에서는 늘 화질이 낮은 초음파 모니터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양수량은 현저하게 적었다. 일반적으로 있어야 할 양수의 30프로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의사가 말했다. 

 내 증상은 조기 양막 파수 혹은 조기 양막 파열로, 알 수 없는 이유로 양수를 둘러싼 양막이 일부 파손되어 양수가 세는 증상이라고.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내 증상이 별 일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견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입원실로 옮겨졌다. 면회 불가라 부모님과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한 채였다.


 병실에 누워 안정되기 시작하자 정말이지 졸렸다. 오랜 여정으로 인한 피로감, 허기짐, 불안감, 안도감이 범벅이 되어 한없이 내 몸을 땅 밑으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양막이 파수되었고 그 탓에 양수가 새고 아이가 위험하고 그렇게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에 어찌할 할 틈도 없이 잠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 간호사에게 내 히스토리를 이야기해야 했다.(오랜 출혈과 튀르키예 병원에서의 입원 등등) 당장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을 만큼 말하는 동시에 의식이 저만치 멀어져 갔던 기억이 난다. 간호사와 인터뷰 후 나는 훅 꺼진 촛불처럼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튀르키예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염에 대응하기 위해 항생제를 처방받고 침상 절대안정을 권유받았다.(그래도 화장실은 내 발로 갈 수 있었다.) 이곳 병원에서도 튀르키예에서와 마찬가지로 1인실에 입원했다.(부모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면회 금지라 가족들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병실은 쾌적했고 비상시 호출을 하면 바로 달려오는 간호사 선생님들과 도우미 선생님들이 있었다. 상황은 답답했지만 병실에 난 큰 유리창으로 유유자적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었고 침대 부근에는 TV와 작은 냉장고가 있어 필요할 땐 어느 정도 오락거리를 즐길 수도 있었다. 그 정도의 여유가 그나마 존재했던 시간이었다. 


 입원 3일째 되는 날 아침. 회진을 돌던 담당의는 나에게 유산을 권유했다. 유산을 할지 말 지가 아니라 언제 유산을 할지 남편과 상의해 보고 말해달라는 말을 들었다. 이대로 버텨봤자 내 몸에 합병증이 올 가능성은 물론, 아이를 낳더라도 아이에게 영구 장애가 올 거라 말했다. 이대로 잘 될 확률은 1% 정도라 말했다가, 아니 사실 없다고 봐야 한다고 고쳐 말했다. 이대로 버티는 것이, 절대, 정답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순간 나는 그 말에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어떤 말도 떠올릴 수 없어, 그저 누운 채 그 의사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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