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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 Miyoung Jan 06. 2024

지난여름, 산에게

한국으로. 

마냥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이후로도 조금씩 양수가 샜다 찼다를 반복했고 불규칙한 출혈도 지속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왔지만 나는 최대한 침대밖을 나서지 않았다. 창 너머 보이는 먼 풍경 속에는 어느새 꽃이 피고 화창한 하늘이 찬란한, 봄을 말하고 있었다. 

 퇴원 후 찾은 첫 병원 검진에서 양수량이 기적적으로 정상 수치를 회복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번에야말로, 결단코 이번에야말로 이 지난했던 과정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담당의는 의사 생활 20년 동안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그러나 검진 하루 뒤 나는 거짓말처럼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전날 밤 또다시 양수가 샜기 때문이다. 병실에서 마주한 담당의는 말을 아꼈다. 이런 농담 같은 상황에 그저 서로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어제까지 존재했던 눈부신 기적은 하루 만에 색을 바랬다. 나와 남편의 다시금 무너졌다.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입원과 응급실을 오가며 병원에 있는 모든 산부인과 의사들로부터 진찰을 받았다. 하지만 뾰족하게 내 증상에 대해 설명해 주는 의사는 없었다. 의사마다 내놓은 견해들 역시 조금씩 달랐다. 어떤 의사는 자궁 안 양막대(Band라 표현했다)를 아이가 건드리면서 양수가 새는 것 같다고도 말했고, 다른 의사는 여러 겹 겹쳐져 있는(레이어화 되어있는) 자궁벽이 그리 쉽게 열릴 리가 없다 말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아기를 둘러싼 양막의 일부가 파손되어 양수가 몸 밖으로 샌다는 단순 명료한 사실을, 빨리 인지하지 못했다. 각기 다른 의사들의 견해를 들을 때마다 남편은 온갖 논문을 뒤져가며 자료와 경험들을 찾아 내 읽었다. 그때마다 각각의 이유들로 우리의 불안감을 증폭시켜 나갈 뿐이었다. 종국에는 내 몸에서 흐르는 것이 양수가 맞긴 한 건지 의심하는 단계까지 접어들었다. 

 두 번째 입원은 3일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도 이제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방안이 딱히 없었다.


 나의 일상은 다시 여러 방면으로 뒤엉켰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사이 벌써 몇 주 연속 휴강을 했다. 더 이상 차질을 빚을 수 없어 퇴원 후에는 침대 위 작은 테이블에 컴퓨터를 올려 둔 채 누워서 수업을 강행했다. 신명 나게 진행하던 동화책 작업은 언제 다시 시작할지 기약도 못한 채 중단했다. 두 번째 입원 전 굉장히 좋은 조건으로 들어온 제안이 있었다. 궁극적으로 애니메이션 영상 작업을 하면서 늘 꿈꿔왔던 형태의 제안이기도 했다. 단순 일러스트가 아닌 영상을 만드는 일로, 적어도 일주일 이상 제법 무거운 스트레스 하에 놓일 것이 분명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잠시, 두 번째 입원이 결정되면서 바로 거절했다. 이미 맡은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 이상 책임 질 일을 만든다는 건 순전한 내 욕심일 뿐이라는 걸 힘들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그때의 나는 정말 몹시도 좌절했다. 임신이란 축복으로 누릴 수 있는 순수한 기쁨을 단 한순간도 누릴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이, 여태 온 힘을 다해 다져온 내 삶을 더 이상 같은 형태로 지킬 수 없다는 무력함이 나를 사납게 덮쳐왔다. 


 처음 임신을 계획했을 무렵부터 남편과 무수한 대화를 나눴다. 여러 화제들 중 튀르키예와 한국, 두 나라 중 어디로 가서 진료를 받을지, 또 출산을 할 것인지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많다. 그와 관련한 남편과 나의 의견에는 이견이 없었다. 최대한 우리 삶의 테두리 안에서, 그러니까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스탄불 안에서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자 했다. 그것이 어떤 옳고 그름과 같은 문제가 아닌 그저 우리 삶의 흐름 안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신 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특별한 문제’에 맞닥뜨린 후, 우리는 한국으로 가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입퇴원 이후에도 양수가 새고 간헐적인 출혈이 보이는 문제는 지속되고 있었다. 우리는 매일 침대 밑에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것 같았다. 언제, 무슨 일이 생겨 다시 병원으로 튀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 증상에 대해 또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의사가 없다는 것이 암담했다. 튀르키예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은 다해보았다 판단한 남편은 고민 끝에 한국에서 의사로 일하는 친구에게 SOS를 보냈다. 친구의 선배가 관록 있는 산부인과 의사라 했다. 남편은 친구에게 내 증상과 여기 이스탄불 병원에서 전해 들은 의사들의 소견을 말했고, 친구는 선배 의사에게 나와 관련된 조언을 구하겠노라 했다. 나를 직접 진찰하는 것이 아니므로 정확한 소견을 듣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때의 우리에게는 무엇이 되었건 믿을 수 있는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했다. 다음날, 여기 이스탄불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전혀 다른 견해들을 전해 듣고 우리는 고민 없이 결정을 내렸다. 한국으로 가는 것, 그것이 당시 내릴 수 있었던 우리의 최선이었다.


4월 23일 일요일 아침, 10시간의 비행을 거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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