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EK Miyoung Jan 05. 2024

지난여름, 산에게

이스탄불 병원 라이프-2

 병원 밥에 대해 논하기가 처음에는 상당히 곤란했다. 입원 후 4일 동안 내 아-점-저 식단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아침: 쵸르바(맑간 국)/물/통조림 과일 3~4 조각

점심: 감자 퓌레/ 쵸르바(맑간 국)/물/통조림 과일 3~4 조각

저녁: 감자 퓌레/ 쵸르바(맑간 국)/물/통조림 과일 3~4 조각

병원에서의 점심. 그리고 저녁


 처음 하루 이틀은 그럭저럭 병원에서 주는 대로 군말 없이 먹었다. 간소한 식단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식단처럼 보였고 심지어 입원 얼마 전에는 감자 퓌레가 먹고 싶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메뉴는 똑같았다. 맛이 질리는 건 어찌어찌 넘긴다 해도, 문제는 이 식단으로는 너무나도 배가 고팠다. 저녁 식사가 나오는 오후 5시 반부터 그다음 날 아침 식사가 나오는 7시까지 아무것도 먹을 게 없었다. 새벽 내내 배 곪는 소리가 병실 가득 울렸다. 심지어 아침 식단에는 그나마 먹을만한 퓌레도 없으니 점심때가 되도록 마른 입맛만 다셔야 했다. 내가 대단한 인물은 아니라도 아이를 품은 산모였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못 먹을지언정 따뜻하게 배가 부르고 싶었다. 나흘째 아침 같은 식판을 받아 들고 남편 앞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도대체 이 같은 식단이 나흘이나 지속되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허무했다. 단지 내가 ‘대변’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침상 안정 탓에 소변까지는 눈 딱 감고 볼 수 있다 치더라도 도저히 큰 볼일까지 침대에서 볼만큼 뻔뻔해질 수는 없었다. 그 정도까지 남들 앞에서 확인받고 싶지는 않은 37세의 어른이었다. 그렇다고 자연스레 나오는 것을 억지로 막은 것도 아니었다. 심리적인 거부감 탓인지 내 장도 무언가 밖으로 내보낼 의지가 없었다. 그러나 병원 입장에서는 환자의 원활한 신진대사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은 입원 이후 단 한 번도 큰 일을 보지 않은 환자에게 유동식을 먹여 활발한 장 운동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듯했다. 입원 나흘째 오후, 나는 백기를 들고 관장약을 투여해 달라 의미심장하게 요청했고 겨우 겨우 거사를 치를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드디어 평범한 식단을 받아먹을 수 있었는데 돌이켜봐도 정말 다시 못 할 짓이었다.

 

 입원 직후, 남편은 학교에 양해를 구해 수업을 휴강하고 내 곁을 지켰다. 며칠 후부터는 다시 학교 수업을 나가거나 자잘한 물건을 가져오기 위해 잠시 집에 들렀다 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내 옆에서 보냈다. 적적한 병실에서 남편은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이해할 수 없는 TV화면 속 튀르키예 뉴스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크고 작은 내 심부름을 하거나 불편한 보호자용 침대에 누워 선잠을 자기도 했다. 가끔은 답답한 마음에 간호사와 의사에게 나의 상태에 대해 묻기도 했다. 나는 침대밖을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온갖 자질구레한 일에 남편 손을 빌려야만 했다. 식사 식판 나르기. 양치 물컵과 칫솔 챙기기. 쓰레기 버리기. 간식 챙겨주기. 손에 닿지 않는 물건들 손에 들려주기. 창문 열기. 블라인드 올렸다 내리기… 자질하지만 꼭 필요한 일들이었다. 남편이 없을 때는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만 어쩐지 의료 스텝에게 그런 하찮은 일을 부탁하기가 멋쩍었다. 한 번은 침대 아래로 핸드폰을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병실에 누운 상태로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낙이 내 범위 밖으로 날아가버린 셈이다. 남편이 오려면 한참 멀었고, 당장 곁에 있는 병원 스텝도 없어 그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침대밖으로 떨어진 물건을 줍는 일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기가 찼다. 다행히 얼마 후 지나가던 간호사가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건네주었다.


 남편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버팀목이었다. 때로는 솔직하게 이 모든 상황을 고단해했지만 남편은 기꺼이, 이 모든 순간을 감당하고자 한다는 걸 나도 잘 알았다. 종종 임신은 산모 홀로 오롯이 겪는 일이라 말하고들 하지만 나는 그리 간편한 말로 임신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을, 남편을 통해 배웠다. 나를 대신해 뱃속에서 아이를 키워내지는 않았지만 남편은 아이를 품은 나를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게 중 다행이었던 건, 남편이 내 화장실 수발까지는 들 필요는 없었다는 부분이다. 남편에게 나와 관련된 대부분의 것을 기댈 수 있지만 그것(?) 만큼은 아직 적나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병원 간호사들과 조무사들이 그 부분을 돌봐 주었다. 많은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었던 부분이다. 

 

 매일 오전 혹은 오후에 한번 진찰을 보았다. 나는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으므로, 의사와 간호사가 초음파 기기를 직접 병실로 가지고 와 진료를 했다. 자궁에 남아있는 양수량과 아이의 움직임 살폈고 그때마다 우리 부부와 의료진은 숨죽인 채 화면 모니터를 쳐다봤다. 처음 입원할 때만 하더라도 의사는 우리 상황이 절망적이라 말했었다. 하지만 차츰 예상보다 희망적이라는 방향으로 견해가 바뀌고 있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양수가 ‘전부’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금씩 양수량이 회복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쏟아지듯 나오던 분비물로 하루 여러 번 교체해야 했던 패드 역시 하루 한번 교체해도 충분할 만큼, 컨디션이 나아지는 듯했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자랐다. 희미한 노크 같았던 태동은, 입원 기간을 거쳐 눈에 띄게 뚜렷해졌다. 남편 역시 처음으로 아이의 존재를 손끝으로 확인했다. 


 너의 발길질을 처음으로 느끼던 아빠의 눈이 얼마나 동그랗고 환했는지, 나는 그때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아이를 잃을 거라는 상실감에 수심이 가득했던 나와 남편도 조금씩 힘을 냈다. 아직 희망을 품어봄직 하다는 말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입원한 지 8일째 되던 날, 나는 깊숙이 박혀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힘겹게 발을 뻗었다. 발에 힘을 실어 바닥을 내딛는 일이 그토록 힘든 일인 줄은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중력이 한꺼번에 온몸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몸이 휘청거려 간호사와 남편이 양 옆에서 내 팔을 붙잡았다. 오랜만에 움직이는 탓에 코에서는 코피가 흘렀다. 아무렴, 좋았다. 퇴원이다. 드디어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감사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난여름, 산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