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먼길을 돌아 도착한다는 것

미련에 대하여_애니메이션 <밤비>

by BAEK Miyoung

나이가 들 수록 머리는 커지고 기호도 분명 해진다는 걸 느낀다.

요즘 깨달은 사실인데 나는 확실히 클래식한 사람이다.

....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그저 포장한 말일 뿐이지만 그렇다.

더 비약하자면 그저 미련이 많고 더딘 사람이다.


뚝딱하면 뭐든 만들어 내는 시대에서 나는 뒤쳐지는 사상을 가진 게 분명하다.

그리 별스러운 게 아니어도 손에 얻기 위해 있는 힘껏 전력투구 하는 게 좋다. 그것이 설령 지금 시대와 맞지 않게 사랑이나 명예, 추억 따위여도 괜찮겠다.


얼마 전 글을 쓰며 디즈니에서 개발한 multiplane camera방식의 애니메이션 촬영 기법을 다시 살펴보게 됐다. 컴퓨터가 일반화되지 않던 시절,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1부터 100까지 까다로운 공정이 존재했고 대부분의 과정이 사람의 손을 필요로 했다. 애니메이션의 깊이감, 거리감을 표현하기 위해 집채만 한 촬영 기계가 고안되었고 그를 다루기 위한 고차원적인 촬영 기술이 요구되어졌다. 이 시절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속 공간감과 캐릭터들의 입체감은 볼 적이면 애니메이션 선조(?)들의 노력과 열정에 깊은 울림을 받곤 한다.

multipl-4aa1.jpg multiplane camera.지금 포토샵의 레이어 개념을 실제 공간서에 구현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애니메이션 <밤비> 1942년작

아..저 사슴 꼬리. 너무 좋다!!!!


손꼽히는 고전 작품임에도 이 역시 한참 나이를 먹은 후에 봤다. 아마 어릴 때 주로 찾아 보던 '인어공주'나 '백설공주' 혹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여자애들이 꿈꾸는 '공주류' 애니메이션이 아니기 때문에 일찍 찾아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꼬맹이가 사슴에 관심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빛과 그림자, 풀과 나무로 꽉 들어찬 아름다운 숲. 그 숲에 사는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동물들의 하모니로 빚어진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다. 순간 순간 아름답다 못해 영롱해서 날 무릎 꿇고 보게 만든 애니메이션. 동물을 좋아하고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를 표현하길 즐기는 나로써는 이보다 좋은 영상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캐릭터들로 마음이 한껏 달아오른다. 특히 주인공인 사슴 '밤비'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입이 떡 벌어진다는 표현이 딱일 만큼 움직임의 묘사가 가히 예술적이다. 일부러 그리 연출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동작이 엉겁결에 넘겨지지 않고 눈으로 다 읽히도록 천천히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움직인다. 한시도 눈을 떼기가 어렵다. 어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서도 이처럼 아름답게 사슴을 묘사한 영상은 또 없을 것이다.

밤과 달빛, 부드러운 실루엣 표현이 정말 아름답다.


예전 애니메이션 수업 중 들었던 얘기로는, 이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스튜디오에 직접 사슴을 데려다 애니메이터들이 매일 이들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bambi2ff.jpg 짠. 찾다보니 자료 사진을 구할 수 있었다.

거대한 애니메이션의 왕국 디즈니도 이 시기는 아직 초창기 스튜디오였고 각 캐릭터나 배경에 걸맞은 자료가 넉넉지 않았다. 요즘처럼 인터넷 검색만으로 쉽게 정보를 찾기보다는 눈으로 직접 만지고 관찰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대부분이라 이처럼 원시적인 접근을 통해 채워지지 않은 경험과 자료를 축적해야 했다. 이런 과정이 쌓여 빛나는 지식이 되고 후배 애니메이터들은 선배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지금의 거대한 디즈니 왕국을, 그리고 전 세계의 애니메이션 덕후를 길러낸다.


그 시절 어쩌다 사람들은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꿈꾸게 되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었다. 일상적인 사진을 찍는 일조차도 큰 일이었던 때에 프레임 단위로 그림을 그리고 동일한 색을 맞춰 칠을 하고 복잡한 기기로 촬영을 하는 일련의 복잡한 과정을 어떤 생각으로 이어나갔을까 상상하면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단 몇 초 몇 분짜리 애니메이션을 현대의 기술에 기대 만드는 일도 쉽지 않은데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들을 마주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만들어냈을 그들의 끈덕진 의지와 마주하게 됐다. 무식하게 보일만큼 무모한 길을 돌아 종국에 그들이 도달한 답은 절대 틀리지 않았음에, 처음엔 그저 경이롭다가 이제는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수작업을 주로 하던 내가 최근 디지털 방식으로 작업 과정을 전환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복잡한 공정을 조금이나마 줄이자는 의도에서 였다. 그러면서 '이러 이러한 기술을 진작 알았더라면 보다 시간을 아낄 수 있었을 텐데. 그 전에 들인 노력은 참 헛수고였다' 한탄 섞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 내가 사용하는 모든 기술의 원천도 돈키호테 같은 선구자들의 보상 없는 시도와 열정 덕에 거저 얻어진 것들이다. 감사히 입 다물고 작업하지는 못할망정 내가 들인 노력의 시간까지 무의미하게 만드는 생각은 다신 하지 말자 다짐 또 다짐했다.

시간이 지나 저 거대한 기계도 과거의 유물이자 현재의 애니메이션을 설명하는 지료로 화석화되고 애니메이션 촬영을 도맡았던 이들의 기술도 낡은 무엇이 됐다. 시간의 흐름은 하루가 바쁘게 요동치고 뒤돌아볼 틈 없는 세상은 어제를 잊는 것에 무감각하다. 이런 세상에서 애니메이션은 어제의 그림에 맞춰 오늘의 그림을 그려야 하는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제의 그림 없이는 오늘의 그림이 없고, 어제의 그림은 그 전날의 그림과 맥락을 함께해야만 의미가 부여된다. 어쩌면 이렇게 한 장 한 장 낱장의 그림을 그리며 끝도 없이 펼쳐진 커다란 지붕 위 기와를 쌓는 듯한 이 작업이 나라는

미련 많은-

고지식한-

좋게 말해 클래식한 사람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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