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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EK Miyoung Sep 27. 2015

궁금한 그 이름

'한일 문화개방'의 기억.  <토토로>  네가 궁금해.

 유학할 때 92년생 친구 하나가 내가 공부하던 앙굴렘으로 이사를 왔다. 그 당시 내 주변 대부분의 유학생 나이는 80년대 중반을 언덕 삼아 태어난 이들이었고 그 때문에 92년생이 태어나-, 자라서-!!, 여기 이 머나먼 곳까지 유학을 왔다는  것에.. 다들 신기함을 감출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흔히 '너희가 88 올림픽을 아느냐'라던 인생 선배들의 덧없는 으쓰댐을 듣고 자랐던 우리가 이 친구 앞에서 '2002 월드컵은 기억나느냐, 그럼 H.O.T.는 아느냐, 대전 엑스포 들어는 봤냐 등등- 이런 의미 없는 얘기들을 풀어놓으며, 할매가 고쟁이 바짓 속에서 눈깔사탕 하나씩 빼내 먹듯 어린 친구 놀려먹는 재미를 익히게 됐다.(아, 선배들이 이런 재미로 날 놀렸었겠지-)

  그러던 중 불쑥 튀어나온 이야기가 바로 2004년 한일 문화개방이라는 키워드. 92년에 태어난 이 친구에게는 무척 생소한 이야기였고(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에 그저 깜놀!), 사실 말을 꺼낸 나 역시도 아주 어렴풋하게만 기억하고 있는 사회적 이슈 중 하나였다. 


그를 떠올리면 몇 가지 자동으로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우선은 언니가 몰래 들고 와서 보던 만화책 '오렌지 보이'와 언니가 애지중지 여기던 손때 묻은 어느 일본 록밴드의 음반.  


그리고 학교 앞 '토토로'  분식집.


참고로 저 오렌지 보이는 유명 만화 '꽃보다 남자' 만화책의 해적판 제목이다.(아시는 분 푸쳐핸졉)


그 시절, 나는 여고생이었고  만화동아리 회원이었다.

일반 인문계 학교였던 모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리 별스럽지 않게 조용했던 평범한 학교였다. 동아리 사람들 역시 생각만큼 유별나진 않았는데, 우리는 그저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의 근황을 나누거나(각자 반이 달랐으므로,) 혹은 돌아가며 각자의 그림으로 노트 페이지를 채워나가는 식의 소소한 활동을 이어갔다. 간혹 선후배들이 모두 모이게 되면 소소했던 친목 모임은 점차 그간 쌓아온 '덕'스러운 지식들이 대량 방출하는 자리로 변모했다. 어렵게 구해서 본 일본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인디 음악이나 재팬 락 밴드, 혹은 한참 유행이던 PC게임에 대한 얘기들로 오랜만에 분위기가 왁자하게 달아오른다. 그런 얘기들 속에서 나는 낄 틈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부유하던 단어들 속을 방황하던 기억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덕'지식의 대부분은 언니를 통해 본 만화책 몇 편과 TV 만화영화, 종종 아버지가 빌려다 주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정도의 평범한 것들이었다. 그리 신기할 것 없을 내 이야기들은 아무리 파헤쳐봐도 손에 쥘 것 하나 없는 빈 주머니와 같았다. 그렇게 잠시 소소한 일탈을 누리던 일상의 풍경 속에서 나는 때때로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없는 듯한' 헛헛함을 느끼면서도, 그 안에 퍼져가는 평온한 웃음과 오랜만에 느끼는 왁자함에 그저 조용히 몸을 담그고 있을 뿐이었다.

 

 락 음악이나 그로테스크한 일본 락밴드들의 꽃 같은 외모, 혹은 PC게임 같은 얘기들은 대부분 내 관심 밖의 이야기이였다. 그러던 중 간혹 귀를 탁 치고 들려오던 얘기들이 바로 일본 극장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특히 지금까지도 대중들에게 핫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대한 얘기는 그 당시 영상을 접할 통로가 마땅히 없던 나로써는 늘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소재 중 하나였다. 그럴 때면 선배들은 무용담을 늘어놓듯 애니메이션의 감상평을 들려주었다. 몇몇 이미지는 떠올릴 수 있지만 영상으로는 잡히지 않았던 작품들에 대한 얘기들은 반질 반질 윤이 났다. 특히 그 당시 자주 언급되던 '이웃집 토토로' 애니메이션은 점차 궁금함을 넘어 언젠가 반드시 보고 말겠노라는 어떤 이유 모를 다짐을 이끌어 내기에 이른다.  

토토로! 누구냐 넌!!!!!!

  어느 날은 웬일로 동아리로부터 특별한 이벤트 소식이 들려왔다. 옆 남학교 만화부와 문화 회관에서 모임을 가진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같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중 하나를 시청하고 서로 감상평을 논하기로 했다는- 참 뻔하고 모범스러운 모임 소식은 무미건조한 일상을 사는 여고생의 마음을 순간 달 뜨게 하기도 했지만 장소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 '달'은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날아갔던 기억이 난다. 모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루했고 기대했던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도 내 다짐 속 '이웃집 토토로'가 아닌 다른 작품이 상영됐던 것이다. 그때 봤던 애니메이션이 바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라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또 다른 명작이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이 역시 명작 중 명작.

 작품이 어떤 경로를 통해 구해진 건지 알 수는 없었다. 나름 문화 회관이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봤으니 합법적인 과정을 통해 영상이 구해졌을 수도 있고, 혹은 그 시절 문화에 목마른 이들이 서로 복제 CD를   주고받으며 음반이나 영상을 공유하기도 했던 때라, 그러한 어둠의 경로를 통해 영상을 보게 되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문화 회관의 질 낮은 영상 장비와 어수선한 분위기, 하나로 모이지 않고 공중에 흩어지던 사운드 덕에 저 애니메이션 역시 큰 임팩트 없이 내 머릿속에서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훗날 다행히 저 애니메이션의 진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고 지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남아 있게 되었다.



 2004년 1월 1일 말 많고 탈 많던 4차 한일 문화개방이 본격화되고, 그간 접하기 어려웠던 일본 문화 콘텐츠들이 조심스레 한국에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내 고등학교 후반부 즈음부터, 극장이나 음반 가게에서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J-pop음악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시종일관 요란스러운 토론의 장을 펼치던 매스컴의 우려와는 달리, 우리의 삶은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무난한 일상을 이어나갔다. 나 역시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토토로'에 대한 미련과 다짐도 잊었다. 굳이 그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대학생이 되어 생활 리듬이 훨씬 다이나믹해졌고, 또 대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면서 새로 익히고 알아야 할 문물(?)들이 그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사회 분위기는 일본 문화를 개방하는 순간  우리나라 문화계는 쓰나미에 쓸려가듯 잠식당할 것이다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가벼운 농담같이 들릴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무척이나 심각하게 논의되던 사회적 이슈였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그때 이후로 한국에 발을 들인 일본 콘텐츠 중 눈에 띌 만한 성과를 낸 것은 손에 꼽을 만큼 얼마 되지 않았고, 되려  우리나라의 드라마나 음악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거대한 붐을 일으킨 걸 보면 사람 사는 세상, 참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


 늦은 호후,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풍경은 늘 이도 저도 아닌 회색빛의 기억이라 회상하곤 한다.  굴곡 없이 비슷한 맥락으로 돌아가던 지루하지만 평화로운 일상. 변화와 정체 사이 어느 구간을 헤매던 시대적 상황과 청소년과 어른 그 사이 어디쯤에 놓여 앞으로 내 몸은 어떤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갈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했던 그 시기는, 그리 찬란하게 컬러풀하지도 절망적으로 어둡지도 않게 그저 그런 회색톤의 나날들로 각인되어 있다. 

 그 버스 정류장 맞은편 시선이 닿는 위치에 토토로 분식집의 낡은 간판이 있었다. 아기자기하지만 허름했고 색이 바랜 하늘색 분식집 간판. 그를 바라볼 적이면 저 분식집 아주머니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저 간판을 만든 건지(만약 봤다면 어떻게 본건지), 아니면 그저 젊은 아이들이 입에 자주 올려서  저리 가게 이름으로 정한 건지  궁금했었다. 그리고 꼭 대학교 가기 전에 저걸 보고 얻으리라는 다짐을 되내이 내가 그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쉽게도 아주머니가 왜 그 이름을 가게 이름으로 정한 건지 아직도 아는 바는 없다.


시간이 한참 흘러 어느 날,

한 DVD가게에서 예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웃집 토토로' DVD를 샀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토토로를 봤다.

나도 갖고 싶다. 토토로 침대.

애니메이션을 다 본 후 놀랐던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애니메이션 안에서 토토로의 등장 분량이 생각보다 길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명불허전! 정말 두고두고 봐도 좋은 작품이라는 말이 옳았다는 점이었다. 

언젠가 어디쯤에서 그를 보지 못한 여자애가 몇 년 동안 기대하고 갈구했던 게 아깝지 않을 만큼, 토토로는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아! 나중에 추가로 놀라웠던 점이 있었는데,

토토로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외적으로 무척이나 닮았다!(궁금하면 찾아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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