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을 지나 극장에 갔네. <원더풀 데이즈>
처음 엄마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스스로 걸어갔던 날은 언제였을까.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뿌옇게 남아있는 기억의 첫 페이지. 그래도 그 첫 꼭지에는 늘 엄마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내가 있었다. 아마 그게 내가 최초로 가질 수 있었던 '나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입이 트이고 또래와 뛰어다닐 수 있을 무렵이 돼서야 엄마 옆구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집 근처 추수가 끝난 빈 벌판이나 길 위쯤은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내 땅이 됐다. 그 역시도 '우리 집'을 중심으로 반경 30미터쯤 되는 공간이었으려나. 저-어기 멀리 보이는 산 너머는 '아라비안 나이트'에나 나올법한 다른 세상일 거라 생각했던 그때, 아직 집에서 아이 걸음으로 10분 거리에 있던 마을 어귀 <다리>까지도 가닿지 못했었다.
사리분별이 그나마 된다 싶은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었을 때 겨우 엄마 손을 잡고 그 다리를 넘어갈 수 있었다. 다리를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뻗은 강둑에는 농사지을 때 필요한 거름더미들로 항상 소똥 냄새가 났다. 거기서 10분쯤 더 걸으면 시내로 가는 버스가 서던 옆 마을 초입이었다. 그리 가기까지 작은 도랑과 누구네 밭 누구누구네 하우스를 지났고 다 무너질듯한 담벼락을 나무로 가까스로 지탱하던 낡은 집도 지나야 했다. 거기엔 사람이 오갈 적이면 담벼락에 난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던 하얗고 큰 개가 있었다. 반기는 건지 노려보는 건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고 단지 어떤 풍경으로 남아있는 그림이다.
그렇게 물 건너 개 건너- 버스를 타고 '시내'라는 곳을 가게 된다. 찔끔찔끔 걸음으로만 넓혀갔던 내 영역이 갑자기 훅-, 버스 바퀴가 굴러가는 거리만큼 넓어져 버렸다.
차차 '시내의 맛'을 알게 된 건 중학교 3학년 무렵. 아이도 아니지만 다 큰 어른도 아닌 애매한 시점의 나이. 이제 엄마 아닌 친구의 손을 잡고 이런 저런 이유로 시내를 들락거렸다. 때로는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 CD를 사기 위해, 때로는 서점에서 책을 사기 위해, 자주는 그저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향했다. 그리고 그맘때쯤에 영화관을 가봤던 것 같다. TV보다 몇 배인지 가늠할 수 없이 큰 화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일정한 공간 내에 앉아있길 강요받던 은밀한 압박감, 짭쪼름한 팝콘 냄새... 영화의 즐거움보다 낯 모르는 이들과 그 분위기 속으로 퐁당 빠지는 즐거움이 컸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 사이 어디쯤의 추억일 텐데 아쉽게도 영화관에서 본 제일 첫 영화가 기억나질 않는다. 그때는 지금처럼 기억을 쉬이 남겨놓을 거리도 없었으니까.(싸이월드도 없었을 때) 그런데 딱 하나. 또렷하게 남아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심지어 인터넷 모 카페에 남긴 글이 아직 남아있기도 하다.
바로 처음으로 혼자 영화관을 찾아갔던 날. 2003년 여름의 기억이다.
2003년에는 내 인생에 꽤나 큰 결정을 내렸던 해였다.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겠노라 집에 선전포고를 했던 해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반대하던 부모님도 다행히 납득해주셨고 조금 늦은 시기였지만 미대 입시를 준비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내 '꿈'을 만천하에 못 박아 걸었던 그해에, 한국 애니메이션계에 지금까지 내려오던 전설적인 애니메이션이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바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
바로 이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산 건너 물 건너 영화관을 홀로 찾았다.
논과 밭을 지나 거름 냄새가 나던 다리를 건너면 하얀 개가 있는 집이 있고 버스정류장이 나타났다.
마을 버스를 타고 더 큰 강과 시의 경계선을 넘으면, 또 다른 버스를 타고 더 큰 시내까지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부산 서면의 롯데시네마. 처음 동행인 없이 찾은 극장은 한산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길이 꼬이지 않고 마침내 올 곳에 잘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홀로 표를 끊고 좌석을 찾아 앉는 어떤 어른이 된 듯한 미묘한 설렘 사이에서 마른 침을 삼키며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래에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놓치면 안될 일이라고- 어린 맘에 생각했던 탓인지 호기심과 의무감이 반반 뒤섞인 관람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애니메이션을 보기 전에 접했던 애니메이션의 예고편과 비주얼은 상상 이상의 기대감을 품기에 충분했었다. 게다가 억 소리 나는 제작비에 장장 7년이라는 제작기간이라니!!!!
그때 직접 극장에서 이 애니메이션을 봤던 나는 저기 저 커다란 스크린 위에 미래의 꿈이 펼쳐져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눈 앞에서 꿈틀대는 애니메이션에 심취하기 보다 저 화면 사이에 어딘가 숨어있을 내 미래의 모습을 찾느라 바빴다.
이 작품이 흥행에 성공치 못 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사업에 타격을 안겼다는 이야기는 좀 더 이후의 이야기들.
난 나름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감상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 좋은 얘기들도 많이 말하고 다녔던 게 기억난다. 그렇게 이 애니메이션은 영화가 아닌 하나의 기억 또는 하나의 다짐으로 내게 남겨지게 됐다.
이후의 나는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며 서울과 부산, 서울과 프랑스를 오가는 거대한 활동반경을 가지게 된다. 허나 이런 물리적 거리를 기꺼이 품을 만큼의 큰 그릇의 작가는 아직, 되지 못했다. 약간 아담한 규모랄까.
6년을 채 채우지 않고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 처음 느꼈던 건, 그 작은 동네에서부터 열심히 내달렸건만 내 손에 쥔 건 딱 한걸음 내딛을 만큼의 영역. 고작 이만큼 뿐이라는 일종의 좌절감이었다. 여태 지나온 그 드넓은 길은 다 뭐였나. 내 것이라 믿었던 그것은 결국 잠시 스쳐온 길에 불과했었구나..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몇 개의 계절을 건너와야 했다. 그리고 차츰 익숙함이 고개를 내밀때쯤 다시 걸음걸음으로 풍경을 채워나가는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릴 때 차곡차곡 쟁여둔 것들로 지금껏 영상을 만들고 그림을 그려왔다면, 지금부터 보고 느끼는 것들은 또 앞으로 만들어질 내 영상과 그림 속에 녹아들게 되겠지...
이제 또 다시 여기 이 쯤에서 부터 시작, 요이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