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후와
커피 여정
한 모금의 모닝커피가 입안에서 꽃향기로 피어난다.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준 커피, 언제부터 마셨지? 불현듯 떠오른 궁금증에 펜을 들었다. 자료를 보니 35년 전이었다. 건축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커피 맛은 몰랐지만, 겉멋에 백화점 수입 코너에서 원두커피를 구매했었다. 사무실 응접 테이블 위에 드립용 추출기구를 올려놓고 방문하는 손님에게 드립을 직접 해서 커피를 내놓았다. 쌉쌀한 맛에 약간 구수한 느낌의 커피였다. 지금 생각하면 마시지도 못할 수준이었지만 그때는 보약이나 되는 듯 내놓았다. 유통기간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지만, 수송과정에서 커피 본연의 향미 대부분은 사라지고 산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쓴맛과 탄 냄새를 감추기 위해 인공 향을 가미한 커피도 있었다. 나름대로 맛있는 커피를 찾겠다는 일념에 발품을 팔고 수입상을 전전긍긍하면서 여러 종류의 커피를 샀다. 이런 노력? 덕분에 마시는 커피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커피 맛의 차이를 조금 알게 되었다. 커피에 눈이 떠지자, 궁금증이 하나둘 생겼다. 그즈음 이었다. 더는 시중의 원두커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갓 볶은 신선한 커피는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뒤이어 ‘커피를 직접 볶아보자!’라고 떠오른 생각. ‘그래,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만들어 마시자!’라는 꿈같은 상상. 지금 생각해도 무모한 발상이었지만 그 도전은 나의 삶과 인생을 바꿔버렸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모르니까 실패를 몰랐다. 수많은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직업까지 바꿔버린 그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쉽지 않았다. 국내에는 개인이 로스팅을 공부할 수 있는 인프라가 전혀 없었다.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오퍼상을 통해 일본제 소형 커피 로스팅 기계를 샀고, 사용 설명서도 없이 독학으로 커피 공부를 시작했다. 로스팅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나는, 맛있는 커피를 볶을 수 없었다. 값비싼 커피를 볶아서 버리고 또 버리고, 그렇게 반복되는 시행착오 덕분에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조금씩 커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궁금증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정말 커피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시간만 흘러갔다. 혼자서는 쌓여가는 지적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 커피를 볶으면서 순간순간 떠오른 의문점과 물리적으로 해결할 과제, 그것은 전문가의 경험과 학문적 영역에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원했던 것은, 나의 궁금증을 커피 전문가에게 질문하고 그 답을 시원하게 듣고 싶었다. 또한, 그들이 맛있다고 만든 커피도 마셔보고 싶었다. 간절하면 이루어지는 것. 어느 날 나는 초지를 찾아 떠도는 유목민처럼, 커피를 찾아다니는 유목민이 되어 이름난 커피 명인들을 찾아 떠돌고 있었다. 정해진 기약도 성공 가능성도 희박한 미지의 여정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음은 피가 뜨겁던 시절, 커피에 미쳐 좌충우돌했던 그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글을 통해 감사드리고 싶은 것은 커피에 미친 조선의 이방인을 배척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기꺼이 나누어 준 유, 무명의 커피 명인들의 따뜻한 마음이다.
생전의 카페 비미(珈琲 美美)의 모리미츠 무네오(林光宗男)씨
카페 비미(珈琲 美美)의 모리미츠 무네오
오랜 기간 동분서주하며 만났던 커피 전문가 중, 커피에 인생을 걸었던 장인 중의 장인이 있었다. 그는 후쿠오카에서 커피점을 운영하는 카페 비미(珈琲 美美)의 모리미츠 무네오(林光宗男)씨. 그는 모카커피를 연구하는 커피 전문가로 에티오피아와 예멘의 커피를 알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차례 현지를 방문한 모카커피의 전문가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2016년 12월 한국에서 융드립 기구 세미나를 마치고 귀국 도중 인천공항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 25여 년 전쯤 그의 커피점으로 기억된다. 이후, 후쿠오카에 가면 그의 커피를 마시려고 하루의 시간을 비웠고, 그의 공간에서 커피를 주제로 대화하는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가 오래전 잡지사에 예멘과 에티오피아 커피에 관해 글을 기고했는데,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숙제처럼 품고 있던 커피 음용의 기원을 유추할 단서를 찾았다. 그래서 무네오 씨의 글과 세계 커피 역사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오마르의 설화를 토대로 인류가 커피를 음용한 시점, 음용의 형태 그리고 언제부터 볶은 커피를 마셨는가를 커피 역사 속의 이야기를 통해 추정해 보려고 한다.
커피나무를 찾아가는 오마르(Omar)
커피의 발견 – 오마르의 예멘 설
히즈라(Hijrah) 656년(서기 1278년) 경, 이슬람의 학자이자 성인 ‘뭇라 샤지리’가 메카를 순례하다가 우사부 산에 이르렀을 때 같이 동행했던 제자 ‘오마르(Omar)’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죽고 영혼이 하늘에 다다를 즈음, 베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네 앞에 나타나면 그의 말에 따라라. 그가 너를 위대한 운명의 길로 안내할 것이다.” 스승 샤지리가 죽자, 그의 예언대로 그날 밤 하얀 베일로 얼굴을 가린 거대한 망령이 나타났다. 오마르는 그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다. 유령이 베일을 걷어 모습을 보여주자 오마르는 깜짝 놀랐다. 형체는 스승의 모습이었으나 죽을 때보다 몸집이 몇 배 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뭇라 샤지리가 땅을 파자 불가사의하게 그곳에서 물이 솟기 시작했다. 스승의 영혼은 그에게 말했다. “ 오마르야, 물을 이 그릇에 가득 채우고 물의 흔들림이 멈추는 곳까지 쉬지 말고 여행을 계속하라. 물의 흔들림이 멈추는 곳, 그 땅이 너를 기다리고 있는 위대한 운명의 땅이다.”라고. 오마르는 스승의 말에 따라 미지의 땅을 찾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가 예멘의 모카 마을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물의 흔들림이 멈췄다. 그러나 그는 여행을 그곳에서 끝낼 수 없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그렇게 아름다웠던 모카 마을이 전염병 페스트에 휩싸여 머물기 어려운 땅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오마르는 스승의 말씀을 생각하며 병자들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그의 기도는 효험이 있었다. 마치 이슬람의 선지자 무하마드의 기도처럼. 점차 아픈 사람들이 하나둘씩 치유되어 갔다. 그래도 전염병은 계속 퍼졌고, 마침내 모카 마을을 다스리는 왕의 아름다운 딸마저 병에 걸리게 되었다. 왕은 오마르의 기도로 많은 병자가 나았다는 소문을 이미 듣고 있었기에 그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딸의 치료를 부탁했다. 오마르의 극진한 기도는 딸의 병을 빠르게 회복시켰고 그녀는 다시 건강을 찾았다. 그러나 오마르는 딸의 미모에 반해 사랑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모카의 왕은 화가 나서 오마르를 추방해 버렸다. 모카에서 쫓겨난 그는 우사부 산속의 동굴에 기거하면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을 한탄했고, 하늘을 보며 스승에게 큰소리로 묻고 물었다. “오오, 샤지리 스승님이시여! 모카에서 일어난 일이 나의 운명이라면, 스승님은 왜 저에게 그 그릇을 주셨습니까?”라고. 오마르가 스승을 원망하며 슬픔에 빠진 그 순간, 고요한 정적을 깨고 매혹적인 목소리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보니,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새가 나무 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오마르는 곧바로 그 새소리 방향으로 뛰어갔지만 이미 새는 없었다. 새가 앉았던 나무에 꽃과 열매가 가득했다. 그는 나무의 과실을 따서 먹어보니 매우 맛이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과실을 가득 채워서 동굴로 돌아왔다. 그는 밥 대신 작은 풀잎을 끓일 때, 따온 나무의 열매를 몇 종류 함께 넣어 끓였다. 이렇게 해서 오마르는 맛있고 향기가 좋은 훌륭한 음식을 알게 되었다. 바로 커피였다. 그리고 커피는 불가사의하게도 기력을 잃고 있던 오마르의 원기를 회복시켰고, 기분도 좋게 했다. 그러자 오마르는 병으로 그를 찾아온 모든 사람에게 그 열매를 달여서 마시도록 권했고, 많은 사람의 병이 나았다. 모카는 오마르를 쫓아냈지만, 그는 커피 열매로 병든 모카 사람들을 치료했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모카의 왕은 그 기적에 감동하였고 오마르를 다시 데려와 극진히 대접했다. 그리고 그를 이슬람의 성인인 세이크(Sheikh)로 추대했다.
이 설화는 모리미츠 무네오 씨가 쓴 글에서 발췌했지만 부족한 후반부의 내용은 일본의 인간의 과학사(人間の 科學社)에서 발간한 ‘히로세 유키오(ひろせゆきを)’교수 외 1인이 쓴 커피학 강의(コーヒー學講義)의 내용 중에서 일부 발췌했다.
커피의 가공 형태
카후와(Qahwa)
오마르의 설화 내용 중에 ‘오마르는 병으로 그를 찾아온 모든 사람에게 그 열매를 달여서 마시도록 권했고, 많은 사람의 병이 나아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 옛 커피의 음용 방식은 설화의 내용처럼 커피 열매를 통째로 넣어 끓이거나 달여서 마신 걸까? 이것에 대한 대답으로 모리미츠 무네오 씨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고 있다.
현재 에티오피아에서는 커피를 분나(Bunna)라고 하지만 이것은 옛날 아라비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사용한 부나(Buna)를 말하는 것으로, 에티오피아 샘족의 언어를 조사한 레스로(Leslau)의 보고서에도 역시 아랍어 분(Bunn)에서 유래되었고, 카후와(Qahwa)는 커피 음용에, 부나는 커피콩과 식물과 관련된 것에 사용한다. 하라 남쪽에 거주하며 샘족 언어를 사용하는 구라게족에서의 카후와는 커피콩, 잎, 껍질을 이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잎으로 만든 커피를 구티 카후와(Qutti Qahwa), 커피콩으로 만든 커피를 분 카후와(Bun Qahwa), 껍질로 만든 커피를 하사 카후와(Hasar Qahwa)라고 부른다.
여러 역사적인 자료를 찾아본 결과, 커피의 어원이라고 알고 있는 카후와(Qahwa)는 이슬람의 8세기에 기술된 코란에도 카후와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없다. 원래 와인의 호칭이라고 알려진 카후와는 13세기가 돼서야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또한 모리미츠 무네오 씨가 견문한 에티오피아 동부 하라 지역에서는 커피 잎을 삶아 낸 음료를 ‘구티(Qutti)’라고 부르는 일반적인 음료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음료는 아침에 딴 어린잎을 그늘에 말려고 비벼서 끓인 음료로 일종의 허브티다. 그리고 껍질로 만든 커피를 호쟈(Hodja)라고 부른다. 호쟈라는 어원은 원래 귀인을 말하는 것으로, 후에 이슬람 신비주의자의 스승 등을 호쟈(Hodja)라고 불렀다. 예멘에서는 카후와, 쓰루, 기시로 라고 하는데, 그 기시로(Qishr) 커피가 살타나(Sultan) 커피로 예멘의 이슬람 세계에서 마셨던 커피음료의 원형인 것 같다. 살타나(Sultan)는 권력자를 의미하며 11세기 이후에는 지배자를 의미하는 호칭이기에, 당시의 기시로 커피는 슐탄(지배자)과 호쟈(귀인)가 마시는 특별한 커피였던 것 같다.
예멘의 커피 기시로(Qishr)와 커피콩
기시루는 타작한 커피 껍질과 생강을 첨가하여 만든 예멘전통의 뜨거운 커피 음료다. 대표적인 그 레시피를 보면, 분쇄한 커피 껍질(기시로) 1컵, 물 3컵, 갈아낸 생강 2스푼, 시나몬 가루 1/2 테이블스푼, 캐러웨이 씨 1/2 테이블 스푼을 끓여서 설탕을 넣어 마신다. 현지에서 기시로 커피를 마셔 본 모리무츠 무네오 씨의 맛 평가는 감기약이나 갈근탕을 마신 느낌이라고 했다.
그러면 기시로를 사용하는 예멘에서는 수확한 커피콩을 어떻게 했을까? 무네오 씨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아라비아지역의 유목민인 베두인(Bedouin) 사람들의 음료로 사용되거나, 수출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기시로는 계절에 따라 가격 달라지고 일 년이 지나면 변질되어 그 가치가 없어지지만 커피콩은 관리만 잘하면 몇 년 동안 상품적 가치를 유지할 수 있어서 농사를 짓지 않는 유목민에게 적합했을 것이다. 수출 지는 에티오피아였는데, 에티오피아가 예멘에서 생산한 커피콩을 역으로 수입했다고 말하면 커피를 좀 아는 독자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그것도 칼디(Kaldi)의 전설로 잘 알려진 커피의 발생지인 에티오피아에서.
삼천 년의 역사를 가진 에티오피아는 기독교 국가로 고유한 문화를 유지한 나라다. 하지만 16세기에 불어닥친 역사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 없었다. 에티오피아도 이슬람 문명에 의해 14년간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그 이후에 이교도 음료로 규정된 커피 음용이 허락된 것은 메넬리크(Menelik) 2세(제위기간 : 1889~1910)로, 이때부터 분으로 만들어진 커피가 예멘에서 수입된 것 같다. 역사의 기록으로 보면 19세기 말경으로 일이다. 그러면 에티오피아에서 전통적으로 행하는 커피 의식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것은 아라비아 베두인족의 커피 음용 스타일을 모델로 독자적인 자신들만의 커피 의식을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에티오피아가 커피의 발상지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매우 오래된 전통으로 생각하지만, 지금의 에티오피아 커피 세리머니는 분명 이슬람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사 카후와(Hasar Qahwa)
와인의 대용품 카후와
태고 시대부터 음료의 왕자는 와인이었고, 잘 익은 포도를 으깨어 놓으면 자연발효가 되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잘 발효된 와인은 달콤하고 강렬한 향기를 지녔지만, 잡냄새가 나는 와인에는 물이나, 향료를 첨가해서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중세 이슬람의 코란에서는 술을 금지했기에 와인의 달콤한 향기를 마실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와인처럼 달콤하고 향기로운 음료를 마시고 싶었고, 부유한 사람들은 와인보다 더 향기롭고 맛있는 음료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때 와인의 대용품으로 커피는 매우 좋은 재료였고 잘 익은 커피 열매를 발효시켜 달콤하고 향기로운 커피음료인 카후와를 만들어 마셨다. 처음에는 건조된 커피를 절구에 넣고 분쇄해서 껍질과 열매까지 함께 넣고 발효시킨 것을 끓인 후에 향료를 첨가했다. 그러나 후에는 볶는 작업이 추가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예멘의 기시루도, 분도 같은 과정을 거친 것 같다. 조리의 기본은 익히는 것이나 굽는 것이고, 구우면 현격히 향미가 좋아지며 달이면 성분의 추출이 잘되기 때문이다.
파리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아 있는 오마르 이야기 기록(1587년)
커피 로스팅의 원조 ‘볶은 카후와’
그러면 언제부터 커피를 볶았을까? 필자가 정확하게 커피는 언제부터 볶았다.라고 역사적 근거로 대면서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없어서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다. 1454년 아덴의 종교학자 자부하니가 준 비밀문서에 볶은 후에 끓인 카후와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이 기록의 ‘볶은 후에 끓인 카후와’가 지금의 커피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섣부르게 예단하지 말고, 먼저 카후와에 대해 다시 확인해 보자. 필자가 본 글의 위에 기술한 ‘오마르의 커피와 카후와(Qahwa)’단락에서 카후와 종류를 설명했다. ‘에티오피아 하라 남쪽에 거주하는 샘족의 언어를 쓰는 구라게족이 마시던 카후와 중, 커피콩으로 만든 분 카후와(Bun Qahwa)가 있다.’라고. 분 카후와는 커피콩으로 만든 음료다. 그러면 자부하니가 기록한 볶은 후에 끓인 카후와는 껍질을 벗긴 분(Bun)으로 지금의 생두라 생각할 수 있다. 잎으로 만든 ‘구티 카후와’나 커피콩 껍질로 만든 ‘하사 카후와’는 아니다. 왜냐하면, 커피 잎과 콩 껍질은 볶지 않아도 끓이면 맛있는 차가 우러나온다. 결론적으로, 자부하니가 기록한 ‘볶은 후에 끓인 카후와’는 지금의 커피와 유사한 커피 음료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지금과 비슷한 커피 음료를 자부하니의 기록대로 1454년부터 마셨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멘에서 커피가 발견되었다는 오마르의 전설에 따르면 커피를 사람이 음용하기 시작한 시점은 1278년 이후다. 즉, 오마르가 예멘에서 커피를 발견하고 모카 마을에서 활동한 후, 세이크라는 이슬람의 성인이 된 시점 이후에 오마르가 마신 커피가 이슬람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럼 커피를 볶아서 마신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범위가 많이 좁혀진다. 즉, 이슬람에서 커피를 음용하기 시작한 시점이 1278년, 자부하니가 기록한 ‘볶은 후에 끓인 카후와’가 기록된 시기가 1454년으로 두 개의 사건 사이에 176년의 시차가 존재한다. 예멘에서 오마르 이후, 누군가에 의해 커피를 볶아 분 카후와를 만들어 마셨는지 알 수 없지만, 176년 동안 분명히 누군가는 커피를 볶아서 카후와를 만들어 마셨다. 그래서 필자는 13세기말에서 14세기 사이에 지금의 커피와 유사한 분 카후와가 음용되었다고 생각한다. 볶는다는 것은 커피에 있어서 대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이 실생활에서 관습적으로 하던 방식을 새롭게 바꾸고 깨트린다는 것은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모리미츠 무네오 씨는 그의 글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고 있다.
“나는 여기 근처에서 카후와는 ‘기시루로 만든 커피’와 ‘분으로 만든 커피’가 분리되었다고 예상합니다. 농경민족 예멘인은 기시루를 보존하고, 유목민족인 베두인족은 분을 취한 것이라고.”
커피 하우스
에필로그
본능적으로 맛있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커피를 만들었다. 그러나 절대로 하루아침에 지금 우리가 마시는 향기로운 커피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의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룬 하나의 성과가 한 모금의 향기로운 커피로 태어난 것이다. 나는 인류가 언제부터 커피를 볶아서 마셨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여러 문헌을 찾아보았지만, 능력의 한계로 더는 확인하지 못했다. 커피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논문과 세계의 도서관에 보관된 커피 관련 역사서에, 이슬람의 수피교도들이 15세기 후반 메카에 커피가 퍼트렸고 16세기경 모스크 주변에 커피하우스가 생겨나면서 카이로에 커피가 퍼졌다. 그런데 무슬림은 커피하우스를 통해 퍼지는 도박과 도덕적 타락이 성행했기에 이을 막기 위해 단속을 했다. 그 결과 1511년 메카와 1539년 카이로에서 공공 커피하우스가 문을 닫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시 정리하면, 지금의 커피와 같은 볶은 커피 음료를 마시기 시작한 시기는 정황상으로도 13세기말에서 14세기 경이라고 볼 수 있다. 혹시라도 삶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좀 더 많은 역사 자료를 찾아서 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고 싶다. ‘역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쓰이며, 책에 의해 변형되고, 겪어보지 못한 자들에 의해 재창조된다. 그래서 역사는 합의된 거짓말일 수 있다.’
글/사진. 이병규 - 대구 남산골에서 커피클럽을 지키는 커피쟁이 (T. 010-3534-5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