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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Feb 18. 2018

시 읽기 좋은 날

눈이 오거나, 춥거나. 한국에서 오바스럽게 무슨 롱패딩이 다 유행을 하나 싶었는데, 올겨울 날씨가 만만치 않다. 잔뜩 움츠린 어깨로 가게에 나와 오픈 준비를 하다, 슬리퍼 바람으로 마트에 장을 보러 가던 발걸음이 주춤거린다.


"애도 아니고 한겨울에 슬리퍼가 다 뭐냐?"

"그러게."

"멋은 둘째 치고, 계절에 맞는 옷이라도 입자."

"응. 난 장 보러 간다. 잘 먹고 가."


신발을 갈아 신다 늦은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들른 친구에게 한소리 듣고 만다. 그래 한겨울에 슬리퍼는 좀 그렇지.


날씨 탓인지 요즘 손님이 뜸하다. 한창 정신없어야 할 점심시간에도 테이블이 꽉 차지 않아, 찾아와 준 손님에게 온갖 서비스를 제공한다. 몸이 한가하니 마음이 춥달까. 바쁠 땐 하루에도 몇 번씩 마트를 뛰어갔다 왔는데, 드문드문 오는 예약 손님을 받으려니 흥도 안 나고 마트 가는 길도 천리 길이다. 신발을 다 갈아 신고도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따뜻한 차를 타려다 엄마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나서야 마트로 향한다.


쌓인 눈 사이로 마트를 다녀와 손님을 맞는다. 눈이 이렇게 많이 왔는데 차를 몰고 이십여 분을 달려와준 반가운 손님 셋. 뱃속까지 뜨끈뜨끈 해지는 동태탕을 내드리니, 말 없는 온기만 가득하다.


손님이 많을 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손님을 계속 주시한다. 밥이나 반찬이 모자란 건 아닌지, 젓가락을 떨어뜨리거나 물을 흘린 건 아닌지, 혹여 빼놓고 안 준 건 없는지, 누군가가 뭔가를 물어오지는 않는지, 살피고 또 살핀다. 하지만 손님이 거의 없을 때 손님을 너무 주시하면 대부분은 부담스러워한다. 이해한다. 대학 때 선배가 그랬다. 뱃속 내장까지 뚫어볼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면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할 수가 없다고.


별생각 없이 손님 쪽을 멍하니 바라보다 선배 말이 생각나 카운터 위에 있는 시집을 얼른 펼쳤다.


'숲을 두고 숲을 두고

그저 당신과 하루만 늙고 싶었습니다

빛이 주검이 되어 가라앉는 숲에서

나만 당신을 울리고 울고 싶었습니다'


눈 오는 날에 맞춤한 시다. 손님이 언제 부를지 모르니 하나의 시를 읽고 또 읽는다. 천천히, 아주 처언처언히.


"여기 밥 하고 반찬 좀 더 주세요."

"넵!"


조용히 밥을 먹는 손님을 앞에 두고 시를 읽으니 맥주 한 잔이 간절하다. 술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냈다. 병 따는 소리에 손님이 일제히 나를 본다. 나는 차마 손님을 보지 못하고 컵에 맥주를 따른다. 맥주 따르는 소리가 가게에 가득하다. 손님의 실소가 내 정수리에 꽂힌다. 아, 뭔가 부끄러.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밥을 거의 다 먹은 손님에게 사과와 식혜를 내주었다. 손님 셋이 사과를 건네는 내 손을 본다. 뭔가 한소리 할 것만 같았지만, 어떤 얘기도 듣지 못했다. (아, 소심하여라.)


"오늘은 서비스가 엄청나네요."

"네. 바쁘지 않아서..."

"잘 먹었습니다."

"눈 오는데 조심해서 가세요."


손님이 돌아선 후에야 손님의 뒤통수를 원 없이 본다. 가게 앞에 주차된 차를 타고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얼굴이 벌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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