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 이모! 아... 문 앞에서부터 밀려오는 이 거부할 수 없는 내적 갈등 어쩔 거야 나. 증말? 고작 간판 바꾼 게 <이공대찌개>라니 <이공대찌개>라니이! 점심시간에 이모 잠깐 보러 오는 데도 내 창의성과 개성에 스크래치를 내는데. 마음이 상해 안상해? 이모, 대답해봐... 전에 <황소식당>이 훨씬 낫잖아요, 이모니임!"
정훈이 형은 이공대 정문 앞에 바로 붙어있는 식당 문에 고개가 반쯤 들어갈 때부터 주인에게 너스레를 늘어놓았다. 이모님은 형이 오면 찌개 사리를 무조건 두배로 내주셨다.
"일단. 그 장로님 따님 분 둔해. 내 스타일이야. 이름이 바뀐 것에 대해 전혀 의문을 안 가지더라고. 상훈이나 정훈이나, 시발. 훨 낫지 내가. 이빨 한번 촥~ 털어드렸지. 웃으시더라고, 잘. 딱 내 스타일이야. 그나저나 이제 너네 집가서, 집밥 못 얻어먹는 거 아니지? 어머님은 너 나갔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계실 텐데. 몰라 씨발, 쟁취하는 거야. 이번에 달릴 거야.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 약속, 도장."
상훈은 정훈 형의 들뜬 모습이 보기 좋았다.
몇 주만에 다시 온 학교는 여름방학이 시작돼서 그런지 조용했다. 다들 어디 간 걸까. 연애 중인가. 정경대 건물 앞. 뜬금없이 서 있는 조지훈 시비에는 주인과 산책을 나온 리트리버 한 마리가 신나게 영역표시를 하고 있었다. 벤치 옆의 플라타너스 나무 이파리가 넓어져서 그늘이 꽤 쓸만했다. 거기 앉아 바라보니 대학원 동 건물의 뒤편 책무덤이 반가웠다. 더 이상 읽지 않는 원서들, 별로 재밌을 것 같지 않은 전공 서적들을 오다가다 그 뒷뜰에 내던져버림으로써 지긋지긋한 영어와의 싸움, 잘난 이빨들의 대멸망을 기원해주는 동지들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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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국회의원의 인턴이 하는 일이라는 건 궁극의 노래방 도우미이라는 걸 파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지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친목, 이익, 봉사단체 회식은 그 형식과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언제나 마지막 코스가 똑같았기 때문이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고 덜 마시는 쪽도 있었지만 최종 바램은 이성의 끈을 놓고 하나가 되는 것이었고. 어쨌든 뭉개야 뭉쳐지는 찰흙인형들처럼 흐트러지기를 원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개인은 쉽게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인격이 될 수 있다. 그곳에 쥐뿔만한 권력이라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술이라도 한잔씩 들어갔다면 도덕과 상식의 기준선이라는 건 물 묻은 휴지로 친 펜스처럼 손가락으로도 끊어진다.
" 헤어스타일 잘 어울려요. 에이- 너무 정색하신다. 우리 강보좌관님! 재미없게. 여기까지 오셨으면 여기선 보좌관님이 우리한테는 의원님이나 마찬가진데... 좀 같이 놀아주셔야죠. 안 그래요?... 요, 정도는 괜찮죠?"
지역 주얼리협회에서 총무를 맡고 있다는 40대 후반의 여자는 상훈의 뒷머리를 쓰다듬더니 그 손을 다시 상훈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억지 건배를 청했다. 너무 가까워진 거리를 다시 넓히려 상훈이 몸을 뒤로 빼며. 한 손을 소파 뒤에 올려 놓았을 때. 오늘 도봉산의 흙길을 걸을 때, 주얼리협회 여성회원님들의 제3의 발이 되어주었을 등산스틱 무더기가 와르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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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주 씨도 이미 취해있었다.
" 거봐! 언니, 올 거라고 했지, 내 말이 딱 맞지? 아저씨, 영화관 말고도 우리 구면이잖아. 아 씨발. 이놈의 인기. 아까, 스타벅스에서 나 봤죠?... 마지막 손님까지 다 받고 나서 나한테 따듯한 물 한잔만 달라고 했던 그거 아저씨. 맞잖아."
서른 두 번째로 뽑힌 이 도시의 신임 시장은 맨손으로 성공한 비즈니스 신화를 가진 건설사 사장 출신답게 눈에 잘 보이는 트로피를 원했다. 도심 한가운데로 이미 오래전에 묻어버린 개천을 다시 복원해 공원을 만들겠다거나. 하다못해 버스 정류장이라도 도로 한가운데로 옮겨서 보여주고 싶어 했다. 새로운 시대는 영상이 더 중요해질 거라는 전임 시장의 문화적인 비젼은 너무 뽀대가 안 났다. 시 문화과에서 지원되던 시네마테크 사업에 예산은 절반에서 다시 그 절반으로 줄었다. 시네마테크의 공식적인 상근직원은 프로그래머이자 영사기사, 자막과 홍보까지 담당하는 차소원 하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런저런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로 모인 자원봉사자들이었다. 덕주 역시 낮에는 커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그밖에 시간에 와서 자막 작업이나 홍보 디자인 등을 도와주는 여러 사람 중 하나였다.
"... 그날, 자막 가지고 뭐라고 한 거 아저씨였어요? 언니, 여기 떨어진 거 보여? 바닥에 지금 누워있네 내 자존감. 그거 독어 사전 찾아가면서 할라믄 몇 시간 걸리는지 알어요? 밤새서 작업하는 거야. 이 아저씨가... 양심없네. 오천 원 내고 들어와서 십만 원짜리 욕을 메기네 지금. 그렇게 잘하면 직접 한번 해보시등가."
삿대질을 하다 탁자 위에 쓰러진 덕주의 플라스틱 의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상훈은 덕주의 의자를 바로 잡았다. 누런 벽지에 오래된 낙서가 빼곡했다. 저마다 한 양동이의 막걸리와 고등어 접시를 앞에 둔 사람들은 이런저런 얘기로 목소리를 높였다. 시네마테크의 자원봉사 일원도 그랬다. 상훈은 말없는 차소원의 옆모습만 힐끔힐끔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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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 저 끝 편의 벽에서 어떤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저녁에 들이부은 음식을 게워내고 있었다. 고갈비집의 나무 벽에 기대선 차소원이 담배를 하나 빼 물었다. 그때 상훈이 문밖에 나오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셨던 차소원이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