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소원은 마시던 맥주잔을 탁 내려놓고는 상훈을 쳐다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한 여름의 소나기처럼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다음 상영 전의 기획으로 <어쨌든 마지막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를 한번 모아보자고 제안했다.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영사기사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남긴 유품, 신부의 검열로 잘려나간 키스컷을 모아둔 마지막 장면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토토의 그 환한 미소는 해피엔딩이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이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는 마지막 편지를 읽을 때, 그가 죽은 줄 모르는 다림이가 조금은 성숙해진 모습으로 사진관 앞에 들렀다가 자신의 사진을 확인하고는 보조개가 들어가는 새침한 미소를 지을 때. 그 영화의 마지막도 어쨌든 해피엔딩이었다. '잉글리시페이션트'의 간호사 한나가 영국인 환자의 일기장을 가슴에 꼭 안은 채 인도인 공병 '킵'이 머물고 있을 작은 마을로 떠나려고 낡은 트럭 짐칸에 앉았을 때, 나무 숲을 뚫고 나오던 보석처럼 빛나는 햇빛의 물결도 해피엔딩이었다. 소원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시네마테크의 영화광들은 자신들이 좋아했던, 잊을 수 없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에 대해 너도나도 입을 열었다. 그 내용이 슬프고 애틋할수록 마지막 장면에서만큼은 관객들을 미소 짓게 하려 했던 수많은 영화감독들의 이름이 맥주 거품처럼 떠돌다가 사라졌다. 모두들 반쯤 취해서 반쯤 꿈을 꾸며 웃었다. 밤에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던 영화감독이 상훈의 어깨를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마지막 인사를 덧붙였다.
"... 잘 대해줘봐요. 자신한테. 아침마다 좋은 커피도 한잔씩 마시고,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야구도 보러 가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쓰게 될 거예요. 좋은 글도."
* * * * * *
아직은 첫차가 출발하지 않은 새벽. 한밤 중에 잠깐 쏟아진 소나기 때문에, 길은 조금 젖어있었다. 차소원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 가지고 나왔다. 열 발짝 정도 뒤에서 그녀를 따라오다 그대로 얼음처럼 서 있는 상훈의 앞으로 다가와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말했다.
"... 바래다주려고 따라오는 거죠? 나? "
소원과 상훈은 6차선 대로 안. 텅 빈 정류장 의자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사실 상훈은 아이스크림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술에 대고 먹는 둥 마는 둥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때, 종로에서 연희동 쪽으로 향하는 163 버스가 왔고, 소원은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상훈의 손을 잡았다. 상훈은 입에 넣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어쩔 줄 몰라하다가 소원이 버린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녀의 손이 이끄는 대로 버스에 올라 버스 제일 뒷좌석에 앉았다. 상훈의 모든 신경은 손에 가 있었다. 자신의 손에서 땀이 난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감각이 손바닥에 모인 것처럼 예민해졌다. 그런 자신이 쪽팔려서 잡혀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렸다. 그때 상훈의 어깨에 기대어 오는 작은 밤톨머리가 느껴졌다.
밤은 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만리동 고개를 올라갈 때, 하늘에는 연한 분홍빛 아침노을이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