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절지 위에 소년의 재능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져 있었다. 숯으로 대담하게 시작한 선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뻔뻔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림 속에 담긴 여자는 바닥에 처참하게 내동댕이 쳐진 모습이었다. 목이 왼쪽으로 심하게 뒤틀려서 시선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미처 다물지 못한 채 벌려진 입의 다른 쪽 뺨이 바닥에 짙이겨지고 있었다. 팔과 다리, 몸통 역시 건강한 상태에서는 나올 수 없는 각도로 꺾이고 틀어졌다. 오른쪽에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날아와 바닥에 부딪힌 소녀의 모습. 중학교 3학년들의 미술 수업. 두 시간짜리 크로키 연습에서 이런 작품이 나올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 요새 학교는 얘들 교복을 안 입히면 학생하고 선생하고 전혀 구분이 안돼요. 나이는 나 혼자 다 퍼먹었는지 선생들은 또 너무 동안이라 스무 살인지 열일곱 살인지도 모르겠고. 애새끼들은 너무 잘맥여들가지고 아니 중학생들이 170,180 짜리들이 우르르 떼 지어서 다가오면 일단 무서워. 그러니까 교권이 안 서. 뭐 한 대 때릴 수가 있나. 그런데! 몸댕이만 컸지. 얘들은 아직 인간이 아니에요. 이것들을 머리로 이해를 할라면은 이해가 안 돼. 반은 동물이야, 동물! 사실 좀 우리 때처럼 패야지. 이거 뭐, 손도 못대게 하니까. 어지간히 날뛰어야지.
저기 윤정아 선생! 자기 들으라고 얘기해주는 거야. 그 반에 강상훈이 있잖아. 그놈이 그게 엄청 골치 아픈 놈이라고. 오죽하면 애 떨어질까봐 담임이 얘 나오기도 전에 육아 휴직을 했겠어요? 지난번에 사고가 나서 끝난 거지. 그 새끼 그거 오토바이 계속 끌고 다니면서 고의로 슬쩍슬쩍 부딪혀서 보험 타내고. 그 짓거리 다 아는데, 계속했으면 소년원에 처넣어버리면 딱 속 시원한 건데. 그 부모들도 똑같이 유별나고... 아, 그래도 한 달 지났으니 이제 적응되죠? 윤정아 선생이 좀 잘 버텨줘요. 아 이거, 귀한 맥주를 왜 따놓고 안 마셔. 팍팍 다 마시고 그래야 미친놈들을 상대하지. 등치가 이렇게 째꼼해서... "
" 3997, 아모르파티! 아모르파티~~ 누구 신청곡? 교감선생님!!!! 아모르파티, 교감 선생님이 눌러놓은 거 아니에요? 잔소리 그만하고 빨리 나와요."
마이크를 받으러 무대 앞으로 나가는 교감의 뒷모습을 보며 여자는 슬며시 가방을 챙겨서 방을 나왔다. 수학선생이 호로록 뛰따랐다. "왜 지금 가게? 금방 끝날 껀데. 그냥 있지. 교감선생님 때문이야? 야... 너한테 잘해주시는 거야. 그것도 못 참냐, 탬버린 몇 번 흔들어주는 거가 그렇게 힘들어? 진짜 가게? 으휴, 너도 너다. 조심히 들어가."
노래방 복도 끝. 1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 중간 참에 화장실이 있었다. 잘 열리지 않는 철문을 몸으로 밀어 열었지만, 스위치를 아무리 눌러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문이 닫히지 않기를 바라며 더러운 세면대에 물을 틀어 얼른 손에 묻은 맥주를 닦았다. 그때 철문이 덜컹 움직였다. 아직 여자의 손에 비누 거품이 남아 있는데. 누군가 닫히던 문을 자연스럽게 발로 잡았다. 얼핏 보면, 양복 입은 청년이라고 믿을 법한. 교복 넥타이를 느슨하게 맨 강상훈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 가람마을 8단지. 지금, 집에 가실 거죠. 쌤? "
강상훈은 마치 자기 아버지 차를 타 듯, 여자의 조수석에 가방을 던지고 앉았다. 깁스를 한 왼쪽 팔이 가려운지 좌석 모서리에 팔꿈치를 계속 긁었다. 여자의 집과 학교는 3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학생이 매일 버스를 갈아타고 통학하기엔 좀 애매한 위치였다. 계기판 옆 LCD화면에 현재 시각 11:47분이 깜박였다.
여자는 아이를 집 앞까지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집, 어딘데?"
"구려. 이 차..."
강상훈의 입에서 사제 간에 지위를 무시하는 어처구니없는 단어가 나지막이 튀어나왔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소년을 노려봤다. 강상훈이 눈빛을 피하지 않더니 오히려 싱긋 웃었다. 어이없다. 10분 전, 노래방에서 열변을 토하던 교감의 쉰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이것들은 인간이 아니에요. 반은 동물이야 동물!'
그제야 문득 섬뜩함이 스쳤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어떻게 알고 노래방 앞에서 담임선생을 기다렸던 걸까? 집 주소는 또 어떻게 알고?'
접촉 사고를 위장해 짬짬이 용돈벌이를 했다는 소문이 도는 아이. 결국 그 오토바이 때문에 친구 두 명이 잃었는데도 일주일 후에 아무렇지 않게 다시 학교에 나오기 시작한 아이. 참혹한 사고 장면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릴 수 있는 아이. 170센티는 훌쩍 넘는 성인 체구의 이 아이가 무슨 나쁜 마음을 먹으면 제 아무리 담임선생이라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여자는 주차장을 빠져나가 도로가 나오면, 아이를 택시에 태워 집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로 가에 차를 세우고 오분쯤 기다렸는데도 유리창에 기대고 잠든 아이는 깰 생각이 없다. 강상훈이 태평하게 코를 골았다.
"... 일어나. 다 왔어. 너네 집 어디야."
기지개를 켜려다 깁스를 한 왼쪽 팔이 아팠는지 '윽' 소리를 낸 소년은 "그냥 사거리 신호등 앞에 내려달라"고했다. 내릴 때 지각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했더니 "쌤도요"라고 받아치고는 차 문을 쾅 닫았다.
멀어지면서 백미러로 아이를 봤다. 강상훈은 차에서 내린 자리에 가방을 내던지고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 같았다. '... 담배도 하시는구나...' 약간은 선생의 책임감을 느꼈지만 피곤함이 더 컸다. 무슨 대단한 교사라고. 두 달만 버티면 겨울 방학. 내년 초에 어영부영 끝날 인연.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해 시동을 끄고 차키를 뺄 때, 여자는 기억해냈다. 두 달 전. 굉음을 내며 요란하게 부딪혔던 오토바이와 스포츠카의 추돌 사고가 일어난 곳. 차 안에서 놀란 눈으로 뒤돌아보던 사거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