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망가자

도망가자 2

괜찮아

by 목문수

언덕 아래로 내려와 편의점이 보이자마자, 친구가 기다렸다는 맥주 두 개를 꺼내왔다. 전봇대 앞에서 탁 하고 캔을 따서 여자에게 건넸다. 친구의 말이 하얀 거품처럼 쏟아졌다.


"세상을 수박껍데기로 배웠네, 얘가. 너 테레비 안 보니? 그 돈으로 전세 꿈도 꾸지마. 니가 그렇게 산수가 안되니까 고마운 거, 창피한 것도 계산이 안 되는 거야. 봐라. 거기 라꾸라꾸 하나 펼쳐 놓으면, 나머지 뭐 비키니 옷장이 하나 제대로 들어가겠디? 조용히 니가 사는 그 집, 니방 한 개가 그렇게 소중하다 감격하고 있어. 씨씨티비도 없는 우범지대라 안돼, 여기. 여자 혼자 못살아. 돈도 쥐뿔 없는 게. 기간제 교사 월급이 한 오백 되는 줄 아는 거 아니지, 너."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식탁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이 집에 내 물건 뭐가 있지?'

책은 열 권씩만 묶어도 존재의 의미가 달라졌다. 밑줄 치고 낙서하고 접어놓은 부분을 누가 펼쳐본다면 좀 무안하겠지만, 다 뭉쳐놓으니 그냥 무겁고 먼지 나는 종이 쓰레기일 뿐이었다. 네댓 번 분리수거장을 오가며 자신의 모든 책을 집 밖으로 꺼냈다. 화구는 좀 까다롭다. 패스. 다음은 옷과 신발. 당장 걸칠 걸 빼면 다 버려도 상관없었다. 필요하면 엄마옷을 가져오면 된다. 친정엄마는 여배우만큼이나 거대한 드레스룸을 가진 사람이었다.


결혼 7년 동안 남편은 그 태도만큼은 티 나게 못마땅해했다.


"귀한 걸 모르네. 당신... 그러다 나도 버리겠어."


변명 대신 웃었다. 미소만큼 편한 게 있을까.

소중한 것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소중해도 가질 수 없는 마음은 또 모를까. 남편은 여자를 모른다. 여자가 결혼할 때 이 사람에게만큼은 티끌의 상처도 받지 않을 자신이 들어서 안심했다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 받지 않는다. 만약 인생을 같이 가는 결혼이란 걸 해야 한다면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랑보다 친절함이 중요하다고. 다음은 노력하면 다 될 줄 알았다.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을 노력해 볼 수는 있을 것 알았다.


그런데 남편이 사랑의 불씨를 피우지 않을 때 여자는 언제라도 순식간에 검고 차갑게 변하는 자기 얼굴을 봤다. 한없이 냉정 해지는 눈빛이 낯설고 무서웠다. 남의 사랑에 기생해야 겨우 온기를 유지하는 흡혈귀 같았다. 다정할 수 있어도 사랑할 수 없다니. 송장들의 블록 끼우기 같은 시시한 섹스도 평생 예의 바르게 잘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자신이 소름 끼치게 싫어지는 고통은 예상을 못했다.


여자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을 핑계로 결혼을 끝내기를 원했다. 남편은 굳은 표정으로 그건 이혼의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원한다면 입양도 고려해보는 거지, 결혼을 끝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그의 단호함에 다른 변명을 찾지 못하던 여자는 그날 이후부터 공황 장애의 강도가 심해졌다. 여자는 누군가 뒤에서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숨 막힘을 느꼈고 그때마다 목을 감싼 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새벽 3시. 제2경인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인천 공항을 향하는 18.35킬로미터의 긴 영종 대교의 건너다보면 알게 된다. 왜 여기서 사람들이 문득 차를 세우고 철제 난간 바깥으로 몸을 던지는지. 계절에 상관없이 피어오르는 뿌연 바다 안개 때문에 시야는 흐리고 하늘과 바다의 경계도 무의미하다. 딱 여기서 이제. 그만 울어도, 그만 후회해도 좋겠다는 확신이 든다. '잠깐이면 돼. 금방 끝날 거야.' 어떤 사람들에게는 귀를 막아도 세이렌의 노래가 들린다.


여자는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침을 삼켰다. 손에서 땀이 났다. 내 팔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핸들을 확 꺾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게... 공포인지 안도감인지조차 헷갈렸다. 어쨌든 의지를 가진 나의 결정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로 정하지 않은 것이, 영원히 결정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거의 집 근처에 도착한 소나타가 우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멈춰 섰을 때, 뒤 편 어디선가 쾅쾅쾅하는 연속된 굉음이 귀를 때렸다. 8차선 신도시의 도로를 제맘대로 질주하던 스포츠카 한 대가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마주 오던 오토바이 세 대와 엉킨 것이다. 오늘 밤의 하데스는 영종도 바다 위 철제 난간이 아닌, 아파트 숲 사거리에서, 게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계속.





https://www.youtube.com/watch?v=_C1QAY0kg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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