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망가자

도망가자 1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by 목문수

"살려고 그러는 거야.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래... 답답해. 숨 막혀. 살고 싶어. 이렇게 죽기 싫다고. 제발 놔줘."


여자는 자기 가슴팍을 손으로 쾅쾅쾅 내리쳤다. 호흡이 가팔라지고 얼굴이 푸르스름해졌다. 과호흡이 시작된 것이다. 남편은 여자를 꽉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천천히 풀었다. 여자는 계속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남편은 며칠 뒤 트렁크에 기본적인 소지품을 챙겨서 서울의 본가로 들어갔고, 근무하던 회사의 베트남 하노이 공장에 파견직을 지원했다. 짧게는 2년에서 길면 10년 연장도 가능한 근무지였다. 떠나기 전 공항에서 그는 긴 메시지를 남겼다.

'아픈 거야, 당신. 장모님 말씀대로 꾸준히 치료했으면 좋겠어. 왜 그렇게 이혼하고 싶은지, 난 전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바꿀 수 있는 걸 알려주면 다 바꿀게. 더 노력할게. 다시 한번 생각해봐. 난 아직 끝내고 싶지 않아. 도착하면 바로 가족 초청을 신청해둘 거야. 6개월 후에 넘어오면 돼. 치료 잘하고 와. 송도 집은 어머니가 정리해주실 거야.'


남편은 여자가 책상 위에 올려둔 이혼 서류를 잘게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두고 떠났다. 여자 생각에도 남편은 과분하게 좋은 남자였다. 학벌이나 직업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애초에 그런 건 하나도 따지지 않았다. 여자는 처음부터 자신을 원하고 끝없이 원하며 사랑해줄 안정적이고 뜨거운 눈빛을 찾았다. 그런 남자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수줍어하는 남편의 첫인상에서 알 수 있었다. 단순하고 선명하고 부드럽고 착한 사랑.



병원에서는 이번에는 제발 꾸준히 1년 이상 약을 복용하라고 당부했다. 공황장애 치료제인 자낙스에 수면효과가 있으니, 졸피뎀 계열의 수면제는 잠시 끊어보라고 권했다. 병원 약국에 나란히 앉아있던 여자의 어머니가 한숨을 토해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 진짜 몇 번째야. 한 서방 볼 면목이 없다. 너 지금까지 한 게 뭐 있니? 얘를 하나 만들었니. 대학원을 마쳤니. 나 너 키울 때 기대 진짜 많이 했는데 이렇게 계속 미친년처럼 구니까. 내려놓게 된다... 한 서방 같은 남자가 어딨다고. 감히... 이.. 혼 입에 올려... 엄마 좀 살자. 제발."



새벽 2시 30분의 지하주차장은 차들도 눈을 모두 눈을 꼭 감은 채 자는 척하고 있었다. 남편이 두고 간 구형 검은색 소나타만이 기다렸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차 안에는 남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지하 1층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 골프장에 가면 맡을 수 있는 흔한 40대 아저씨 냄새. 진한 초록색 애프터 쉐이브가 핸들에 배어 있었다. 여자는 시동을 켜고 오후의 통화를 떠올렸다.


"... 정아야. 근데... 만만히 보면 안 돼. 요새 남자 중학생들 덩치가 너 두배는 돼. 말은 또 좀 안 듣니? 일은 내가 눈치껏 알아서 빼줄 텐데. 담임은 안 맡을 수가 없어. 선생이 지각하고 그런 거 절대 안 돼. 대신 미술실은 네 거니까 작품 구상도 좀 하고... 육아휴직 6개월만 쓴다고 했으니까... 내년 1월이면 끝나. 그래도 내가 교장선생님한테 너 약 먹고 그런다는 얘긴 안 했거든. 잘해라. 내 목이 걸려있다."


여자가 먼저 부탁한 일이었다. 빨리 돈을 벌어서 남편 집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 때 같이 교직을 이수하고 일지감치 사립중학교 수학 선생으로 정착한 친구에게, 기간제 교사라도 좋으니 아무 자리 나 되는대로 부탁한 것이다. 마침 딱 자리가 났다면서 일사천리로 구한 직장이 중학교 미술교사였다.


한밤의 사거리 신호등은 출혈된 붉은색으로 명멸했다. 주변이 어둡고 적막감이 클수록 정신이 더욱더 또렷해졌다. 파란색 프로작 한알을 목구멍에 밀어 넣고 기억을 잃는 것보다, 영종 대교 휴게소에 차를 세워놓고 검은 바다를 한두 시간쯤 보고 오는 게 그녀에게는 더 깊은 휴식이었다. 그때 도로 저편에서 오토바이 서너 대가 굉음을 내며 신호를 무시한 채 좌회전을 했다.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기 때문에 바퀴와 노면이 닿는 순간 파파팍 불똥이 튀었다. 반대편 차선에서 유리창문으로 팔을 괴고 있던 택시 기사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야.... 미친 새끼들아!"


신호등 불빛이 초록으로 바뀌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자의 검은 소나타가 밤의 긴 다리를 향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계속.








https://www.youtube.com/watch?v=D0l1Hdemy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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