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옵니다, 넋으로 우리에게 천천히
얼마 전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소식이 있었다. 남편이 작은방에서 "어... 어!!! 와!!!" 하고 소리를 치길래 축구 보나 하고 들어가 봤더니, 속보로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국어로 된 책이 노벨문학상이라니.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한강의 소설은 두 권을 읽었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는 처음 읽은 것이 5, 6년 전이었는데 파격적인 묘사와 플롯으로 지하철에서 읽어 내려가다가 헉 하고 입을 틀어막았었던 기억이 있다. '소년이 온다'는 친한 언니 오빠들과의 술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최근에 가장 많이 울었던 이유가 그 책을 읽으면서였다고 하는 한 언니의 지나가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책을 구해다 머리맡에 두었는데, 누군가 "그 책 5.18 내용이지 않아?" 하는 정도가 책을 읽기 전 유일한 단서였다.
자기 전에 조금만 읽다가 자야지 하고 열었던 책은 단 한순간도 내려놓지 못했다. 결국 새벽 두어 시가 되어야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 어찌나 울었던지 화장실에서 찬물 세수를 하고 들여다본 거울에는 퉁퉁 붓고 붉어진 눈이 있었다. 그 당시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을 생각해 보면 단순한 슬픔을 넘어서 고통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왜 그렇게 고통스러웠을까. 그것은 내게 있어서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타자화되어 있고 뭉뚱그려져 있던 무언가를, 실재했던 누군가의 비극이자 아픔으로 오롯이 목도하게 되어서임이 아닐까 싶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내가 태어나기 십여 년도 전에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은 종종 어떤 이들에 의해 다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아니었음에도 누군가에 의해서는 이렇게, 또 저렇게 정의되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툼의 주체가 아닌 이들도 그 사건을 각자의 정의로 객관화게 되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는 이 사건을 한 가정과 개인의 차원으로 끌고 내려온다. 교과서에서 몇 장의 사진과 함께 묘사되어 있는 사건은 총탄에 목숨을 잃는 동호와, 애끓는 어머니와, 일곱 대의 뺨을 맞는 은숙으로 분해된다. 나는 겪지 않아도 겪은 것처럼, 부러지지 않아도 부러진 것처럼, 차마 눈을 감고 외면하고 싶은 낱낱의 장면과 통곡을 보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림원에서 "잔인한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통해 ‘증언 문학’이라는 장르에 접근한다”는 그 말이 너무나 와닿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이전의 내가 낯설어지는 참으로 신기한 경험을 했다. 책을 읽을 즈음에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프로그램 내에서 치열한 갑론을박을 일으켰던 명제가 있었다. 바로 '국가 발전에는 유능한 독재자가 필요한 시기가 있다'였다. 물론 저 명제에 대해 국가 발전이 뭘 뜻하는지, 유능한 독재자라는 건 뭘 뜻하는지 등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들이 나올 수 있으나, 난 사실 간단하게 '필요할 수도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었다. 책을 읽고 난 후, 어쩌다 그 명제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명제에 대해 완벽히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오늘 교보문고에 갔더니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강의 책은 이미 다 팔리고도 남아서 예약을 하려는 손님들로 줄을 서있다. 나도 그들 곁을 서성이다가, 책을 집필하며 압도적인 고통에 매일을 울었다고 하는 한강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고통으로 탄생한 인간 존엄성에 대한 또렷한 직시를 떠올린다.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