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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Mar 04. 2024

전멸


밖으로 나오니 한쪽 편에 이 요새에 대한 설명을 적은 보드판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런데 모두 스페인어로 쓰여 있고 영어는 단 한 줄도 없었다. 관광객들로 먹고사는 나라에 왜 영어 설명이 없을까. 생각해 보니 아바나시내 다른 관광지에도 영어설명이 없는 곳이 많았다.


물론 쿠바에 오는 관광객들 대부분이 러시아, 유럽, 재외 쿠바인들이고 미국인들 비중은 상대적으로 그리 높지 않다. 특히 미국인들에게 쿠바여행은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캐나다가 러시아와 함께 제일 많은 관광객이 오는 나라이고, 유럽에도 영어권 사람들이 상당히 많지 않나. 게다가 누가 뭐라 해도 영어는 세계 제1공용어이고.


만약 그런 영어를 일부러 빼놓았다면, 혹시 미국이 꼴 보기 싫어서? 그렇다면, 스페인은? 어찌 보면 쿠바입장에서 미국보다 더 미운 나라가 스페인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처음 쿠바를 식민화한 것도, 외세들에게 착취의 물꼬를 튼 것도,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팔아먹은 것도, 모두 다 스페인 아닌가. 몹쓸 전염병을 퍼뜨려 원주민들을 전멸시킨 것도 그렇고.


사실 콜럼버스가 도래한 후 얼마 안돼 이스파니올라(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와 쿠바를 비롯한 ‘신대륙’ 원주민의 95% 이상이 사라졌다. 거의 멸종이었다. 콜럼버스와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다뤘다. 금과 향신료에 혈안이 된 그들은 원주민에게 일정량의 금 할당량을 정하고, 만약 지키지 못하면 두 팔을 잘라 버릴 정도였다.


특히 콜럼버스 2차 항해 때는 스페인 왕실에게 ‘신대륙’에 금이 엄청 많다고 허풍을 떨어 배 17척과 1200여 명의 대선단을 지원받은 터라, 그 투자에 대한 배당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더욱더 폭압적으로 변했다. 이 당시 스페인 정복자들의 잔학성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하워드 진 교수가 그의 <미국민중사>에서 자세하게 기술했다. 특히 하워드 진 교수는, 한때 노예를 사용하는 대농장 소유주이자 성직자로 쿠바 정복에 참여한 라스 까사스 Barholome de las Casas의 보고서를 소개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스페인인들은 칼날이 잘 섰는지 확인해 보려고 원주민을 열 명 스무 명씩 칼로 베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살점을 시험 삼아 잘라내곤 했다. 한 번은 앵무새를 들고 가는 어린이 둘을 우연히 만나자 앵무새를 빼앗고 어린이 둘을 재미 삼아 목을 베어 버린 적도 있었다고 썼다.


원주민들은 사금을 캐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 땅을 파고, 돌을 옮기고, 흙을 등에 지느라 하루 종일 허리도 못 편 채 일해야 했다. 라스 까사스는 이에 대해 “이들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광산을 비롯한 노역지에서 절망적인 침묵 속에 고통받으며 죽어갔다”라고 했다.


광산으로 끌려간 원주민 남자들의 경우도 금덩이로 만들 만큼의 사금을 채취하는데 대략 8개월이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따라서 원주민 부부는 서로 얼굴을 8개월에 한 번씩 보게 되는데, 만나도 이들은 아이를 갖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를 낳으면 뭐 하나. 일단 산모가 먹을 게 없으니 젖이 나오지 않고, 또 어떻게 간신히 키운다 해도 결국 병에 걸리거나 영양실조로 죽어 버리곤 했으니까. 게다가 조금만 더 크면 금 채취 노동에 시달려야 하고.


라스 까사스 자신이 그 섬에 있던 석 달 동안 무려 7,000명의 갓난아기들이 죽은 것을 봤다고 한다. 남편은 광산에서, 부인은 일하다가, 아이들은 젖이 없어 죽어 갔다는 것이다. 절망에 빠져서 아들을 우물에 빠뜨려 죽이는 엄마들도 봤다고 했다. 라스 까사스는 “이 섬에는 인디언을 포함해서 6만 명이 살고 있다. 결국 1494~1508년까지 300만 명 이상이 전쟁과 광산, 노예 노동으로 사라진 것이다.”라고 썼다.


사실 인구수에 대해서는 여러 출처와 학자마다 이견이 있긴 하다. 어떤 역사가들은 100만 미만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800만이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세상이 콜럼버스와 스페인 정복자들이 들어온 이후 지옥으로 변했고, 그 지옥 안에서 그들은 고통 속에 삶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 일행이 도착했을 때 선물을 들고 환영했던, 칼이 무엇인지도 몰라 무턱대고 손으로 만졌다가 베이기도 했던, 순진한 세상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콜럼버스가 처음 상륙한 쿠바 동쪽 어촌마을 바라코아에 그려진 벽화. 콜럼버스가 상륙했을 당시의 상황을 그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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