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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Mar 11. 2024

콜럼버스


물론 ‘신대륙’ 원주민의 전멸원인이 스페인인들의 잔학함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결정적 이유는 바로 천연두, 장티푸스 등 전염병이었다. 일찍이 가축을 숙주로 하는 병균에 면역력이 있던 유럽인들과 달리, 수렵과 채취 생활을 하던 원주민들에게는 그 병들에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아메리카대륙에는 가축이 살고 있지 않았다. 소, 돼지, 말, 닭 등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가축 대부분은 콜럼버스 때 처음으로 들어온 동물들이었다. 소위 말하는 ‘콜럼버스의 교환 Columbian Exchange’에 의해서였다.


‘콜럼버스의 교환’은 콜럼버스가 아메리가 대륙에 도착한 이후 구세계(유라시아)와 신세계(아메리카) 사이에 이루어진 다양한 교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과학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가 1972년 <콜럼버스가 바꾼 세상>에서 처음 사용한 말인데, 간단히 말하면 유럽에서 소, 돼지, 말, 닭 등 가축과 천연두, 홍역 같은 질병 등이 아메리카로 유입됐고, 거꾸로 아메리카에서는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 작물과 매독 같은 병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중 특히 천연두 같은 질병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책에서는 “인디언들은 스페인 사람들을 단지 힐끗 보거나 냄새만 맡아도 쉽게 죽어갔다”라고 했다. 그만큼 전염성뿐만 아니라 치사율도 엄청났다는 얘기다. 참고로 미국 오클라호마 의료연구재단(Oklahoma Medical Research Foundation: OMRF)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전염병의 충격이 유럽 흑사병보다 더 치명적이었다고 한다. 흑사병은 1347년부터 1352년 사이 5년 동안 유럽인구 2천5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었다.


사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콜럼버스를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로 교육받았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고도 하고.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콜럼버스 역할을 맡은 영화 <1492: 천국의 정복>을 보면 제일 처음에 그가 아들과 함께 바닷가에 있는 장면이 나온다.


콜럼버스는 레몬을 까면서 아들에게 저기 수평선에 있는 배를 보라고 한다. 그리고 눈을 감으라고 한 뒤 잠시 후 다시 떠보라고 한다. 그러자 아이가 그런다. “어, 아빠 배가 사라졌어!” 그러자 드빠르디유는 씨익 웃으며 레몬을 보여준다. “지구는 둥글단다 얘야. 둥글다고!” 난 그 장면에서 닭살이 돋았다.


사실 그때도 유럽 사람들은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지구 구형설이 밝혀졌고 지구 곡률까지 계산했다. 유럽에서도 중세시대에 이미 정설로 굳어졌다. 16세기에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하면서 증명을 하긴 했지만, 적어도 당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이사벨라 여왕도 물론 마찬가지였고, 콜럼버스 아들도 초등학생이라면 알고 있었을 거다. 1492년이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지 50년 지났을 때이다. 그때의 유럽사람들이 그렇게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영화 첫 장면에서 아들의 반응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콜럼버스, “아들아! 지구는 둥글단다. 둥글다고!”

아들, “아빠 왜 그래. 어디 아파?”


내가 잠시 살았던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콜럼버스데이가 공휴일이 아니다. 그래서 특히 학교과제가 많을 때면 불만이 있었다. 다른 주에서는 10월 12일을 ‘콜럼버스 데이’로 부르고 놀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에서 1937년에 매년 10월 두 번째 월요일을 연방정부 법정 공휴일로 지정했는데, 이 날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 한 것을 기념해 학교와 은행들도 문을 닫고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웃기는 얘기 아닌가. ‘발견’이라는 것은 원래 없던 것을 새롭게 찾았을 때 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아메리카 대륙에는 이미 유럽인들이 오기 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나. 자신들이 볼 때 ‘신대륙 New World’인 것이지, 이미 오래전부터 거기에서 가족 친구들과 잘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엄청 황당한 소리인 거다. 자신들이 볼 때 ‘미개’하다고 해서 그들의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들도 그들의 문화와 전통이 있었다.


‘발견’했다는 말은 전형적인 서양중심, 유럽중심의 역사관이다. 그리고 우리조차 서양사람이 아님에도 그대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 한 것이 아니고 원래 있던 땅에 '도착’ 또는 ‘침략’ 한 것이다. 게다가 그와 일행이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의도였던 아니던 말 그대로 멸종시킨 것이고.


그나마 지금은 미국도 콜럼버스에 대한 시선이 많이 바뀌고 있다. 그의 폭정에 대한 비판이 퍼지고 ‘콜럼버스 데이’를 없애자는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심지어 여러 주에서 콜럼버스 동상의 머리가 잘려 사라지기도 한다. 콜럼버스 데이 대신 ‘원주민의 날 (Indigenous People’s Day)’로 바꿔 원주민 중심의 역사관으로 그들을 기리는 행사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원주민의 날’은 1992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처음 제정된 이후 최근까지 오리건,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 100곳이 넘는 지자체에서 ‘콜럼버스 데이’ 대신 불리고 있다. 시카고에서는 콜럼버스 동상 2개를 철거했고, 특히 2020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경찰의 가혹행위로 숨진 이후, 백인중심의 역사관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되는 경향과 함께 콜럼버스데이 역시 재조명되는 추세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그에 대해 같은 입장을 밝혔다. 그는 취임 첫 해인 2021년, "오늘 우리는 많은 유럽 탐험가가 부족 국가와 원주민 공동체에 가한 잘못과 잔혹행위 등 고통스러운 역사를 인정한다"라고 말하고, "한 국가로서 우리가 과거의 이런 부끄러운 사건을 묻어버리려 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은 우리 위대함의 척도"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콜럼버스 데이’를 ‘원주민의 날’로 선포했다. 전임 트럼프 대통령은 콜럼버스를 ‘용감무쌍한 영웅’이라 부르며 콜럼버스를 비판하는 이들을 ‘극단주의자’라고 했지만.


물론 여기에는 반대도 만만치 않다. 특히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이 콜럼버스데이 명칭 변경에 반대소송을 내기도 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이 미의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원주민의 날’이 실제로 미국 전체로 정착되는 데에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런데 정작 쿠바에서는 그런 기미가,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현충원처럼 수도 아바나에 엄청난 크기의 묘지가 있는데 그 이름이 El Cementerio de Chritobal Colon, 즉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묘지이다. 면적이 무려 15만 5천 평이나 된다. 말이 16만 평이지 축구장을 75개나 모아 놓은 엄청난 크기다.


실제 콜럼버스 유해가 묻힌 곳은 아니다. 쿠바의 전직 대통령이나 유명 인사들이 많이 매장된 묘지이긴 한데, 한때 콜럼버스 유해가 스페인 세비야대성당으로 향하기 전 잠시 안치되었던 곳이다. 이곳의 이름을 아직도 콜럼버스 묘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만약 한국에서 동작동 국립묘지를 '도요토미 국립묘지'라고 부르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미국 콜럼버스데이 퍼레이드 - 출처: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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