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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Jan 29. 2024

몸무게 200킬로 쿠바여자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아바나 리브레 Habana Libre 호텔’ 앞에 도달했다. 지난번 가족과 쿠바 여행을 왔을 때 묵었던 곳. 문득 가족생각이 난다. 혼자 여행 오면 다 좋은데 이런 게 싫다. 갑자기 혼자가 된 듯한 느낌. 누가 시켜서 하는 여행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번에 쿠바로 오기 전이었다. 집에서 우버를 타고 LA공항으로 향한 지 5분 정도 지났나,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그러자 아내가 그런다.  “어떻게 알고 전화했어?”. 나는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아들 녀석이 아빠 보고 싶다며 서럽게 울고 있다는 얘기였다.


아니 이런. 아까 우버를 타기 전 만해도 계속 게임머니 얘기만 하던 녀석이? 난 그때 속으로, 아무리 철없는 중1이라 해도 아빠가 한 달 넘게 집을 떠나는데 어째 아무런 감정이 없냐고 생각했었는데. 참 종잡기 어려운 사춘기다.


아들이 전화를 건네받았다. 녀석은 거의 숨이 넘어갈 듯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너 아빠가 몸무게 200킬로 쿠바여자랑 쿠바에 눌러살까 아님 돌아올까.” 그러자 녀석 왈, “돌아와...” “그래 그럼 알았어. 아빠가 한 달 후에 꼭 돌아올게. 아빠가 없으면 네가 엄마를 케어해줘야 하는 거 알지?”


사실 예전에 내가 아들 녀석에게 주정을 부린 적이 있었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예전처럼 아빠한테 다가오지도 않는 아들 녀석이 서운해서였다. 그때 내가 아들 녀석에게 그랬다. 너 그렇게 아빠한테 퉁명스럽게 대하면 아빠도 생각이 있다. 그때 티비에서 봤던 몸무게 200킬로 되는 여자랑 살거다. 넌 엄마랑 둘이 잘살아라...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유치 찬란한 심통이었다. 다음날 아침, 아들 녀석이 실실거리며 그 얘기를 내게 꺼냈고, 한동안 녀석은 나를 놀릴 때 그걸 무기로 삼곤 했었다. 난 취기로 했던 헛소리 덕분에 한동안 녀석과 아내에게 놀림을 당해야 했다.


호텔 앞에 다다르자 잃어버린 외장하드를 한번 더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여행 때 호텔방에 두고 나와서 나중에 프런트에 연락해 봤지만 결국 찾지 못한 사진 파일들이었다. 매일 밤 자기 전 그날 찍은 사진들을 정리했었는데, 체크 아웃할 때 깜빡 잊고 침대 밑에 두고 나왔었다.


가족이 함께한 쿠바 여행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라 무척 안타까웠다. 방을 나서면서 분명 이불까지 들춰가며 빠뜨린 것 없나 확인을 했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사진이 담긴 외장하드를 잃어버리다니.


벌써 석 달 전이라 당연히 남아 있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텔에 들렀다. 프런트에서 상황설명을 하고 묵었던 방 번호를 말했다. 1415호. 신기하게도 그게 기억이 난다. 2층에 올라가 담당직원을 만난 후 함께 방으로 갔다. 다 똑같은 방일 텐데도 그때 가족이 며칠 함께 묵었다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


침대들 사이와 바닥 그리고 틈새들을 다 뒤져봤다. 역시나 없었다. 쿠바 친구의 말로는 삼성 로고가 쓰여있으니 누군가 벌써 팔아먹었을 거라고 한다. 꽤 비싼 값에 팔렸을 거라면서. 에효, 나 자신을 자책해야지 누굴 탓하겠나. 괜히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텔직원과 인사를 하고 로비 밖으로 나왔다.


호텔을 돌아보니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인상이 생생하다. 멀리서 어렴풋이 봤을 때 이 호텔은 엄청 큰 현대식 건물이었다. 하지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면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방은 요즘 호텔 같지 않게 꽤 넓었지만 침대시트의 색깔이 흰색이 아니라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어 왠지 청결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제대로 세탁이나 됐을지 의문이었지만. 여기가 습도가 높은 지역이다 보니 눅눅한 느낌이 들었고 촉감도 부드럽지 않은 약간 까끌한 느낌의 시트였다. 그래도 그건 견딜만했다. 바퀴벌레에 비하면.


사실, 처음 호텔방에 들어갔을 때 내가 맨 처음 맞닥뜨린 것이 바퀴벌레 가족이었다. 어릴 적 시골집에서 봤음직한 낡은 티비장식대 위에 바퀴벌레 여럿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아내가 보면 기겁할게 뻔했다. 아내에게 잠시 뒤돌아있으라 말하고 나는 바퀴벌레 소탕작전에 들어갔었다.


일단 두루마리 휴지를 손에 칭칭 감은 후 벌레들이 들어간 장식대 안쪽을 살폈다. 역시나 그것들은 어두운 장식대 구석에 피신해 있었다. 고개를 빼고 손을 집어넣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 대충 이쯤이면 끝에 닿았으리라 짐작하고 꾸욱 눌렀다. 손끝에서 마치 팝콘 터지는 듯한 감촉이 느껴진다. 확인해 보니 세 마리쯤 잡은 것 같다. 나머지는 그새 도망갔다. 와이프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잠깐 장식대 좀 고쳤다고 했다.


 이 호텔이 제공하는 룸서비스는 바퀴벌레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 위층의 물이 새어 내려와 내 머리 위로 똑똑 떨어지곤 했다. 머리를 앞뒤 또는 좌우로 움직이며 그 물을 피해보려 했지만 결국 머리전체에 물을 골고루 뿌린 꼴이 되었다. 그 물이 어떤 물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층마다 수직으로 같은 변기 쪽 라인일 테니 적어도 식수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물세례를 받고 난 거의 30분간 폭풍샤워를 했다. 그런데 그나마 우리 층은 나은 편이었다. 기분이 찝찝하다 뿐이고 또 씻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18층에 묵은 사람들은 씻을 물이 말 그대로 참새 오줌처럼 나와서 샤워하는데 거의 1시간이나 걸렸다고 했다. 이벤트꺼리도 참 다양한 호텔이었다.


이 방에서 환한 아침햇살에 눈을 떴을 때는 무척 상쾌했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호텔방 커튼을 제쳤다. 아바나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카리브해 섬나라답게 너무도 청명한 하늘, 몽글몽글 하얀 구름빵, 멕시코만을 향해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어느 것 하나 감탄을 자아내지 않는 풍경이 없었다. 하지만 시선을 아래로 돌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포탄을 맞은 듯 폐허로 변한 집들과 갈라진 벽 사이로 파편처럼 널브러져 있는 벽돌 조각들, 그리고 마치 고대 유물처럼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집들이 투명한 햇살에 흉물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그 곁을 나와 똑같은 차림의 사람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오가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몸은 슬로비디오처럼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도시 전체가 화려한 꿈과 처연한 현실이 중첩되는 자각몽에서 허우적대는 듯한 느낌이었다. 버려짐과 살아남음, 그 사이에서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가야 할 길을 잃어버렸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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