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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30

나는 지금 죽어가는 중입니다.

by 안녕
우리 모두 다 무덤으로 가는 중인데
뭐가 그렇게 신나고 좋을까?




매년 독감 백신을 접종받았던 어머니는 코로나 백신도 모두 접종하셨고 나에게도 백신 접종을 강요하셨다. 다른 가족 모두 각자의 이유로 백신 접종을 완료했으니 유일하게 나만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셈이었다. 집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백신 접종을 하러 나가는 일이 나에겐 더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B형 간염 백신 접종을 완료했음에도 B형 간염 바이러스 보균자가 된 전례가 있었으니 그래서 매년 어머니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독감 백신조차 맞지 않았다. 백신의 효능에 의문을 가진 상태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코로나 백신을 맞을 용기는 없었다. 무엇보다 백신 부작용으로 치료를 받게 될 경우, 백신 부작용으로 인정받지 못할 경우에 부담해야 할 병원비는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었다. 캄보디아 봉사활동을 위해 파상풍 주사를 맞은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백신 접종을 했을 뿐이다. 만약 백신 패스가 필요했다면 나 역시 위험을 감수하고 코로나 백신 접종을 했겠지만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나는 그렇게 버텼다.

그래서 아팠던 일을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걱정할 일을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오빠가 PCR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고 코로나 19 확진되었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 활동적이신 어머니는 백신 접종을 완료했으니 안심하고 다니셨는데 그럼에도 걱정되어 여쭈어보니 그제야 어머니도 확진되었던 사실을 털어놓으셨다. 어머니는 백신 접종을 독려한 상황에서 막상 자신이 확진되니 머쓱한 마음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거였고 나는 미접종으로 인해 감염된 거라 야단맞을까 봐 숨긴 셈이다. 나도 아팠던 사실을 뒤늦게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당장이라도 서울에 오실 듯 안타까워하셨고 화를 내셨다. 연락도 안 하고 치료도 안 받고 혼자서 죽으려고 했냐며 나무라셨다.

나이 드신 어머니의 꿈은 여행이었다. 차를 타고 다니며 이곳저곳 여행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다. 나는 부모님의 성화에 서울에 와서 가장 먼저 운전면허증을 취득했지만 운전은 겁이 났다. 내가 다친다거나 차가 파손되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누군가 나로 인해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다. 내가 조심한다고 해도 누군가 뛰어들 수 있는 골목길은 언제나 위험했다. 그래도 달리고는 싶었으니 누군가 뛰어들 일이 없는 레이스 경주장에서 마음껏 달리는 것이 나의 소원인 셈이다. 가상현실에서 레이서로 지낸 지 몇 년째,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고향에 와서 차량 여행을 다니자고 하셨다. 하지만 아직 그곳으로 돌아갈 용기는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었고 마음껏 울 수도 없다는 사실이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어 거절했다. 어쩌면 사사건건 부딪히다가 결국 백수인 딸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날이 올 지도 모르기도 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어느 가족의 모습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았다. 밥 먹을 때 흐르는 숨 막히는 적막 그리고 길에서 마주쳐도 서로 아는 체하지 않는 모습은 나에게 너무나 익숙했지만 현실에서 그런 가족이 어디 있을까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 형제들은 길에서 마주쳐도 서로 아는 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따로 모여서 술자리를 가져 본 적도 없었고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다. 각자 생존,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거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옷방만이 제 기능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방은 늘 비어있었다. 침대가 놓여있는 거실이 내 생활공간이 되었고 거실 통창으로 바깥세상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 되었다.

바로 앞의 주차장 덕분에 창밖은 막힘이 없어서 채광이 좋았고 그래서 선택한 집이기도 했다. 근처 전통시장에 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은근슬쩍 주차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낮에는 관리 아저씨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근처 학생들이 와서 흡연을 하기도 했고 노상방뇨도 했다. 그런 넓은 주차장은 길 고양이가 드나드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주차장에 드나드는 이들의 걱정뿐만 아니라 건물 사이로 보이는 골목길 구경을 하기도 했고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도 했다.

남쪽으로 나있는 창 앞은 언제나 따뜻했다. 가끔씩 날아드는 새들의 지저귐이 좋았다. 처음엔 참새 두 마리가 찾아왔는데 그들이 떠난 자리엔 새똥이 남았다. 어느 날은 좀 더 큰 새가 오더니 근처에 사는 까치와 까마귀도 찾아왔다. 거대한 새들의 방문에는 놀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방문이 잦아지자 거실 창밖 난간은 새똥으로 지저분해졌다. 강렬한 햇빛에 이내 말라붙어서 잘 닦이지도 않았고 매일 같이 반복되니 닦는 걸 포기해야 했다. 큰비가 오면 깨끗해지긴 했지만 새들의 방문이 더 이상 반갑지 않게 되었다. 까치, 까마귀 덕에 보이지 않던 비둘기까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실 창가에 앉아서 하루를 보내던 일상이 은근히 불편해졌고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고 있던 중이었다.

방문객이 없으니 내가 살기 편한 상태로 살아왔지만 그래도 가끔 손님이 오면 설명을 해야 했는데 왠지 변명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불편함이 없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지만 어느 순간 변화를 주고 싶었다.

거실 창밖으로는 저 멀리 SBS 방송국 건물과 목동 오목교 부근의 고층 아파트가 보였다. 고층 아파트를 바라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높은 아파트에 살겠다는 꿈을 가졌던 적이 있었지만 아파트에 살아보니 그곳은 나에겐 다소 위험한 곳이었다.

아파트에 살면서 새벽마다 베란다 창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면 이내 정신이 들기도 했지만 시도하면 할수록 이내 적응이 되었고 어느 순간엔 저 아래 바닥이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뛰어내릴 수 있었고 17층에선 단번에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결심한 그 순간에 좀 더 단호해질 수 있도록 버킷리스트를 실행하기로 했다. 미련을 없애기 위해 하나씩 실행하며 살다 보니 남들 눈에는 한껏 즐기는 삶을 사는 걸로 보였는지, 다들 부럽다고 했다.

'나는 지금 죽어가는 중입니다.'

까미노를 다녀온 뒤에는 또 다른 미련을 생각해 냈다. 마지막 순간에도 살고 싶은 마음은 있었던 모양인지 계속 생각해 냈고 계속 생각이 났다.

이곳 빌라로 이사 왔을 때도 거실 창을 연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고작 5층은 살아날 확률이 높았다. 어정쩡하게 살아남는 그런 바보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고층 아파트에 불이 켜지는 밤이 되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성처럼 보였다. 갈 수도 없고 이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지만 빛의 성을 바라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그곳에 새로운 불빛이 등장했는데 그 새빨간 빛을 처음 본 날 기절해 버렸다.

고층 건물에 있는 경고등 때문이었다. 꼭대기와 건물 가운데만 있던 경고등 불빛은 그다지 눈에 거슬리지 않았는데 두배로 늘어났던 모양이다. 여러 개의 높은 건물에 있던 경고등이 두배로 늘어나자 수많은 빛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빨간 점이 수십 개로 보이자 울렁증과 함께 헛구역질이 났다. 어지러움이 심해지니 바라보기 힘들어졌다. 증상은 계속되었고 정신을 다잡고 다시 보아도 빨간 눈처럼 보였다. 낮에는 새들 때문에 밤에는 새빨간 경고등 때문에 꿈꾸던 바깥 풍경은 사라졌다. 침대에 누워서 창밖을 보던 낙이 사라지니 거실 생활이 힘들어졌다. 어쩜 그 빨간 점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화장실이 딸려있는 큰방으로 침대를 옮겼다.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이 아무래도 어색했다. 집에서 가장 추운 곳이 하필 큰방이라 지난겨울에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가장 따뜻한 작은방으로 옮겼다. 그러고 아팠었고 한동안 누워만 있었더니 골방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체력이 회복되자 거실의 책장을 비어있는 큰방으로 옮기기로 했다. 통 책장이 아닌 조립식 책장이라 구조에 따라 설정할 수 있었고 2단 책장 24개는 내 기분에 따라 구조가 달라졌지만 은근히 불편했다. 새 책장으로 교체하려고 했지만 마음에 드는 책장을 구하지 못해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 어질러진 모습이 싫어서 책장 청소와 책 먼지 제거는 항상 하루 만에 처리했었다. 책장 정리를 하다 보면 항상 열이 났고 두통이 생겼다. 알레르기로 인해 힘들어지면 결국 책 먼지는 대충 털어내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책 하나하나의 먼지를 제대로 털어내기 위해 이틀의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비어있던 큰방은 드디어 서재가 되었다.

책장을 치우니 거실에는 TV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TV를 보기 위해 한동안 그대로 두었으나 필요한 방송만 보고 방으로 들어오는 게 왠지 불편하게 느껴졌다. 늦은 시간의 거실은 황량해서 드라마를 포기하는 일이 잦아지자 결국 TV를 방으로 옮기기로 했다. TV를 가지고 들어오니 침실이 주요 생활공간이 되었는데 제대로 골방에 갇혀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안락함이 느껴져 마냥 싫지는 않았다.

거실 생활을 청산하고 방으로 들어오자 서재가 생겼고 옷방 그리고 침실이 생겼다.

바깥을 내다보던 일이 줄어들자 이제는 바깥세상에 관심이 사라졌고 며칠이 지나자 원래 그랬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지루하고 지루한 나날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하이힐을 즐겨 신었다. 발바닥이 예민해서 두꺼운 플랫폼 힐을 찾아서 신다 보니 자연스레 뒷굽도 높아지게 되었다. 발만 편하면 되었으니 힐 높이는 중요하지 않았으나 주변 사람들은 늘 못마땅해했다.

"키도 크면서 무슨 그렇게 높은 구두를 신고 다녀?"

그러나 난 오래도록 신었던 구두에 익숙해서 하이힐을 신고도 잘 뛰어다녔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여자들이 앓는다는 무지외반증은 없었다. 하지만 운동화를 신으면 왠지 불편했다. 힐이 내려앉는 느낌에 발등이 아팠다.

회사를 그만두기 6개월 전부터 체력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에너지 소모가 불필요하게 많아진 느낌이었다. 밥을 먹는 그 과정이 더 큰 에너지 소모가 되었다. 도보로 10분 거리 회사는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식은땀에 젖어있었고 책상에 엎드려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래서 업무 시작 전에 쉬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출근을 더 빨리해야 했다. 빨리 걸을 수도 없었고 조심스럽게 걸었음에도 다리가 후들거려 휘청거리게 되었으니 더 천천히 걸어야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구두 탓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높은 구두를 신고 다니니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 아냐!"

낮은 구두는 발바닥이 아파서 걷지도 못했다. 내가 홍콩에 처음 갔을 때는 큰맘 먹고 구입한 아주 예쁜 구두를 신고 갔었다. 하루 종일 쫓아다니느라 시간이 부족한 관광이 아닌, 여유 있는 자유여행을 하고자 처음으로 무계획으로 갔던 여행이었다. 급할 일이 없으니 괜찮을 줄 알았다. 주변의 조언에 따라 바닥은 얇고 뒷굽은 3cm도 안 되는 구두를 신고 갔다. '발이 아프면 카페에 가서 커피나 마시며 앉아서 쉬지 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백 미터도 못 가서 발바닥이 아프기 시작했고 아스팔트 바닥의 작은 알갱이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껏 멋을 부리고 왔으니 운동화는 따로 챙겨가지도 않았다. 절뚝이며 간신히 호텔로 돌아왔고 발이 아파서 나가기가 힘들었다.

그때의 그 끔찍한 기억으로 바닥이 얇으면 신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잘 걷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떨어지니 다들 구두 탓을 했다. 이 또한 스트레스였던 나는 결국 운동화를 구입했다. 그리고 운동화를 신고도 잘 걷지 못하자 그제야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운동화에 익숙해지자 내 발이 변하기 시작했다. 20년 동안 편한 구두를 신었을 때는 안 생기던 무지외반증이 운동화를 신고 나서 생기기 시작했다. 한번 변형된 엄지발가락은 계속 휘어졌다. 다시 구두를 꺼내보았지만 이미 운동화에 익숙해진 내 발은 더 이상 구두가 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일상을 함께 했던 구두는 더 이상 신을 일이 없어졌고 발에 맞던 운동화도 오래되자 낡아버렸다. 까미노를 갈 때 등산화를 구입했는데 등산화는 바닥이 두꺼운 편이지만 푹신하지는 않았다. 기본 깔창은 까미노가 끝나자 바닥의 모양 따라 울퉁불퉁하게 변해있었다. 무엇보다 발톱이 상해서 까미노를 다녀올 때마다 발톱이 빠졌다. 나에게 맞는 신발을 찾지 못해서 지금도 여전히 먼 길을 떠날 때는 등산화를 신고 다녔다.

'발톱은 드러나고 바닥은 푹신한 신발'이 필요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크록스도 토 오픈이 되지 않으면 오래 걸을 수 없었다. 마룻바닥이 불편해서 실내에서 신으려고 사두었던 샌들을 주로 신고 다녔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면서 체력은 회복되었지만 방바닥을 걷는 일에도 발은 쉽게 망가졌다.

'그동안 왜 눈치를 보고 살았을까!'




나는 빵을 좋아했다. 특히 겉은 바삭, 속은 쫄깃한 갓 구워 나온 바게트를 좋아했다. 빵을 마음껏 먹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빵이 맛있고 저렴한 포르투갈, 러시아는 빵을 먹기 위해 떠날 수도 있는 곳이었다. 유럽은 빵뿐만 아니라 치즈가 저렴하기도 했다. 뭐든지 저렴한 베트남도 좋았다.

피자는 대부분 토핑에 따라 가격이 차이가 나고 맛도 다르지만 난 피자 도우를 좋아해서 피자 가장자리를 안 먹는 사람이 있으면 미리 잘라서 바꾸어 먹기도 했다. 화덕에 구운 피자라면 도우에 치즈만 올라가도 나에겐 훌륭한 피자였다.

갓 구운 빵이 그리웠다.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빵 하나 사 먹기에 부담이었고 그렇다고 하나만 사 먹자니 충분하지 않았다. 빵을 저렴하게 먹고 싶어서 집에서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오븐도 사고 레시피에 따라 물품과 재료도 구입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가장 쉽다는 발효가 나에겐 제일 어려웠다.

집에 있으면서 다시 도전했다. 이제는 오븐도 없고 베이커리에 필요한 재료를 구입할 형편이 아니었으니 최소한으로만 준비했다. 밀가루, 이스트, 소금, 설탕이 전부였다. 밀가루에 이스트를 섞고 '이스트 먹잇감'으로 설탕과 소금을 조금씩 넣고 반죽했다. 적당량의 물을 넣고 치대어서 동그랗게 모양을 내었다. 반죽 표면이 마르지 않게 랩을 씌우는 대신 뚜껑이 있는 유리볼에 담아두었다.

하지만 항상 발효에서 실패했다. 제대로 부풀지 못하니 맛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발효가 되어 두배로 부풀어 오른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발효 시간을 6시간에서 10시간까지 늘려보고 이스트 양도 늘려보고 더운물을 사용해보기도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발효를 위해서 적당한 밀폐 공간이 필요했는데 잘 사용하지 않는 전자레인지가 적당한 공간이었다. 나는 뚜껑이 있는 볼에 반죽을 담아서 전자레인지 내부에 넣어두고 발효를 시켰다. 아침에 만들어두면 오후에는 구워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매번 실패하다 보니 기대감이 없었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알람을 설정해 두는 것조차 잊어버렸고 전자레인지에 넣어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다음날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빵이 생각났고 그제야 전날 발효시키느라 전자레인지에 넣어둔 반죽이 떠올랐다. 아차 싶어 꺼내보니 반죽은 두 배 이상 부풀어서 뚜껑은 열려있었고 반죽은 넘쳐났다. 정말 발효가 제대로 되어있었다. 프라이팬에 담으니 가스가 빠져나와 부피가 다시 줄어들었지만 상온에 두니 다시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성공은 우연히 왔다. 바로 '시간'이었다. 발효에는 20시간 이상의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던 거였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전날에 반죽을 만들어 두니 매일 아침, 빵을 구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잘 사용하지 않던 오븐은 처분하고 없으므로 뚜껑이 달린 작은 프라이팬에 빵을 구웠다. 프라이팬에 반죽을 넣고 뚜껑을 덮은 후 제일 약한 불로 10분간 구웠다. 그리고 뒤집어서 8~10분을 구우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빵이 완성되었다. 알람을 맞추어 두었으나 팬 뚜껑에 이슬이 맺히면서 팬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사실상 다 구워진 셈이었다.

자주 만들어 먹다 보니 이제는 프라이팬에다 반죽을 바로 만들어서 발효를 시켰고 아침에 팬 그대로 구웠다. 하루 동안의 발효만으로 충분해서 솔직히 2차 발효는 필요 없었다. 잘 부풀어 오른 그 상태로 팬에 구워도 맛있었다.

볼에다 재료를 넣고 오래도록 치대야 쫄깃하다는데 여러 번 테스트해 보니 반죽 과정은 사실상 중요하지 않았다. 물을 넣고 쓱쓱 비비는 수준이어도 맛있었다. 제대로 부풀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팬에다 반죽을 직접 하니 낭비하는 재료가 없어서 좋았고 설거지 거리가 줄어서 편했다.

반죽이 매끈하게 될 정도의 물을 넣고 반죽해야 하지만 똑같은 물 한 컵을 넣어도 매번 반죽 상태가 달라서 이제는 그냥 감으로 양을 조절했다. 양을 확신하지 못할 때는 뻑뻑함보다는 질척함으로 만드는 편이 좋았는데 나머지는 이스트가 알아서 완성해 주었다.

기름 없이 프라이팬에다 빵을 구워야 해서 코팅이 벗겨지기 쉬우니 자주 교체할 수 있는 저렴한 팬을 사용했다. 다이소에서 18cm, 20cm 프라이팬이 3,000원이었고 뚜껑은 2,000원이었다. 하지만 뚜껑이 18cm뿐이라 팬도 18cm에 맞추어 함께 구입했다. 일 년마다 프라이팬만 바꾸어주면 오븐은 따로 필요 없었다. 3천 원짜리 팬은 과열방지 장치가 있는 가스레인지에는 빈 상태로 올려두기 힘들 정도로 가벼워서 지금은 묵직한 인덕션 겸용 5,000원짜리 프라이팬을 쓰고 있다.

드라이 이스트는 이마트 제품 100g 2,600원이 가장 저렴했는데 보통 유통기한 다 될 때까지 충분히 사용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냉장고에 보관해 두어서인지 유통기한을 넘겨도 발효는 잘 되었다. 밀가루는 할인 행사 때마다 구입해 두었다.

오븐도, 비싼 베이커리 재료도 다 필요 없었다. 꼭 필요한 핵심 재료만으로도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만원의 행복이란, 어쩜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살아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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