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의 통합, 보라
과학에서의 우연은 위대한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자주 쓰는 염료의 발견은 그러한 우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많다. 앞서 소개한 빌헬름 셸레의 초록색 이후 영국의 젊은 화학자가 또다시 화학적 염료의 역사를 쓰게 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색은 모브(mauve)라는 이름을 가진 보라색이다.
윌리엄 헨리 퍼킨(William Henry Perkin)은 1838년 3월 2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퍼킨은 왕립 연구소에서 강의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실험 과학에 심취한 어린 소년에게는 흥분과 선망 그 자체였다. 그러나 1850년대에 화학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분야가 아니었고, 심지어 화학을 가르치는 학교조차 드물었다. 퍼킨의 아버지는 아들이 건축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퍼킨의 화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꺾을 수 없었다. 결국 퍼킨은 15세에 당시 위대한 화학자 중 한 명인 호프만(August Hofmann)이 화학 교수로 있던 런던 왕립 화학 대학에 입학했다.
여러분은 ‘백인의 무덤(Wite Man's Grave)으로 악명을 떨치던 말라리아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19세기에 말라리아(Malaria)는 심각한 문제였다. 1820년, 프랑스 화학자 Joseph Pelletier와 Jean Biename Caventou가 기나나무(cinchona bark) 껍질에서 퀴닌(Quinine)을 분리했고 이 퀴닌이라는 성분은 말라리아에 탁월한 치료적 효과를 보였다. 그러나 나무껍질에서 분리된 퀴닌은 턱없이 부족했고 호프만 교수는 이 성분으로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합물을 합성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분자 구조, 즉 원자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관한 통찰이지만, 당시 화학은 정확한 분자식을 결정할 수는 있을 만큼 학문적으로 발전되지 못했다. 작은 분자의 구조만 쓸 수 있었을 뿐 고리 구조는 아직 알려지지도 않았으므로 퍼킨은 퀴닌의 분자 구조를 전혀 몰랐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럼에도 퍼킨이 퀴닌 합성을 시도한 것은 그의 대단한 열정과 자신감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퍼킨은 호프만 교수 밑에서 치료제를 개발하는데 몰두했고, 집에 작은 임시 실험실을 만들어 퇴근 후에도 끊임없이 인공적 퀴닌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사실상 실험의 실패라고도 할 수 있었던 아닐린(coal tar의 일반적인 추출물)과 다른 화합물의 조합에서 우연히 보라색이 만들어진 것이다. 퍼킨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이 아름다운 색에 처음에는 로마 황제가 입었던 '티리안 퍼플'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이 이름이 혼란스럽다는 지적을 받자(실제 뿔고둥에서 추출한 염료를 지칭하는 보라색이었으므로), 꽃 이름 mallow에서 이름을 따서 mauve라고 불렀다.
퍼킨이 발견한 이 합성염료는 화학이나 과학 전반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본격적으로 합성염료 시대의 막을 열게 된다. 직물 염색과 인쇄는 더욱 다채롭고 저렴해졌고, 예술가들은 더 많은 색조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퍼킨의 연구와 그 응용법은 당시 화학적 지식과 사회에 매우 유용했기 때문에 1859년, 퍼킨의 나이 불과 21살이었을 때, 모브의 중요도를 인정받아 뮐루즈 산업 협회로부터 금메달을 받았고 이후에도 많은 상과 영예를 안게 되었으며 1906년 기사 작위를 수여받아 윌리엄 헨리 퍼킨 ‘경(Sir)’이 되었다.
모브를 자세히 보면 보라색인지 분홍색인지 의심스러울 수 있다. 실제 mallow 꽃의 색상은 다양하고, 일부는 보라색보다 분홍색에 더 가까운 종도 있다. 모브를 색상환에 배치하면 연한 마젠타와 다소 뿌옇게 보이는 보라색 사이에 위치하는데, 이 색은 라벤더 컬러와 혼동하기 쉽다. 라벤더는 꽃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또 다른 연보라색인데, 이해를 돕기 위해 색상기호를 포함한 라벤더와 모브를 비교한 것을 아래에 제시하였다.
독자들의 개인 취향은 분명 다르겠지만 두 컬러 모두 꽃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생의 이름이란 것을 알고 나서 두 물감이 펼쳐진 그림을 본다면 꽃의 향기가 나는 상상에 빠질 것 같다.
나폴레옹 3세와 결혼한 외제니(Eugénie de Montijo) 황후로부터 모브의 영감은 시작되어, 1859년부터 패션의 열풍을 일으켜 런던은 도시 전체가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국의 가장 유명한 작가인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조차도 이에 대해 언급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나의 창밖을 내다보니 퍼킨의 보라색이 절정에 달한 듯하다. 보라색 손이 열린 마차에서 손을 흔든다. 보라색 줄무늬를 가운을 입은 사람들을 기차에 가득 채우고, 깃발을 휘날리며 보라색으로 물든 증기차가 철도역을 메운다. 모두 보라색 낙원의 철새처럼 시골로 날아간다. (... all flying countryward, like so many migrating birds of purple paradise)'
- 주간지 All the Year Round, 1959, 9. -
사실상 모브는 동양인에게 어울리기 힘든 색이기에 독자분들 중 ‘이 색깔 옷을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다.’고 생각할 사람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보랏빛 색이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가 젊은 화학자가 자신의 다락방에서 고군분투 끝에 우연히 탄생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