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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Aug 06. 2020

공대생의 신박한 고백법

사랑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타고

얼마 전에 브런치에서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읽었다.


작가는 서랍 정리를 하다가 편지를 발견했고 그 편지에 얽힌 주인공은 20대 초반에 사귀던 남자였다. 남자는 어떤 활동으로 2년간 해외에 나갔어야 했는데, 다시 돌아와도 상대가 혼자라면 사귀자는 말을 했단다. (두근두근) 나는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제발 그 사람이 작가님의 현 남편이기를 바랐으나 아쉽게도 그는 훗날에 떠올리면 기분이 몽글몽글해질 추억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크,, 아쉬웠지만 이게 옛 사랑얘기의 정석인 걸까? 나의 소녀시대처럼 여운이 남는 이야기여서 나는 이 이야기를 남친에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남편은 그 편지의 존재를 안대?


얘기를 듣자마자 남친의 반응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모르지. 얘는 그게 중요한가? 3년 반을 만나면서 나와 내 남자친구는 이 문제에 대해 논할 일이 없었는데, 이걸 묻는 걸 보면 얘는 지난 연인의 편지를 소장하고 있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인가 보다.


얼마 전, 네 명의 친구와 만났을 때도 반응이 반으로 나뉘었다. 스페인 남자친구를 사귀는 한 친구는, "야, 내 남친은 전 여친들 사진, 이름 명으로 폴더에 정리해놨어"라고 했고 우리는 경이로움에 빵 터졌다. 해외분들은 클라스가 다르구나.


내가 편지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남친은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너도 편지 가지고 있지?" 나는 굳이 남친의 질문으로 토론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 어영부영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그날 밤, 나도 왠지 20대 초반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서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나는 어떤 고백을 받았더라?


충격.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건 정말 충격적이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알아주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너 그때 그랬었잖아"라는 말로 친구가 잊어버린 기억을 찾아주곤 했고, 친구들은 그런 나에게 "넌 진짜 기억력이 좋다"라고 말했었다.


굵직굵직하게 싸웠던 날들은 기억이 나는데(왜 하필?) 무슨 말로 고백을 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길. 이렇게 늙는 걸까?


그래도 지금의 남자친구가 어떻게 고백했는지는 기억할 수 있다.


교대역에서 치킨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그때 조금 말이 없이 어색하게 걷고 있었고 내가 '얘는 왜 말을 안 하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남친이 말했다.


손 잡을래?

   


그렇게 손을 잡고 걷다가 지하철 역에 도착하자 남친은 보관소에 숨겨 놓은 스피커를 부끄러운 듯이 꺼냈는데, 나는 두 가지 이유로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가는 게 아쉬워서 강남역에 가자고 제안했는데 남친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거절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꽁기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교대역에 스피커를 숨겨 놓아 동선을 바꾸면 안 됐던 것이었다. 그리고 보통의 남자라면 준비할 꽃이 아닌 스피커를 바라보면서 '정말 신박한 고백이다'라는 생각에 웃음이 터졌었다.


훗날 물어보니,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바로 블루투스 스피커를 결제하고 선물 줄 날만 기다렸더랬다. (이 단순하고 실용적인 논리를 가진 제 남친은 기계공학과 출신 공대생입니다.)


덕분에 나도 기분 좋은 추억이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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