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노르망디 : 몽생미셸 수도원 가는 길, 여행정보
과정이 여행이고, 여정이 보상이다.
토끼가 거북이보다 더 빨리 달려서 도착한 이유는 여유롭게 목적지 주변의 풍경을 보기 위해서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반대로 거북이는 목적지로 가는 여정 자체를 만끽하기 위해 천천히 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 온통 처음 보는 것들, 모르는 길. 어쩌면 여행은 그 길 위에 잠시 서 있으려 떠나는 여행 같았다. 스티브 잡스의 명언처럼 내게는 그 여정이 바로 보상이었다.
파리에서 서쪽 끄트머리 바다 위에 있는 몽-생-미셸 수도원으로 가는 길,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왜 이렇게 내리고 싶던지... 책 한 페이지에 내용이 밀실해서 자세히 보는 바람에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는 것처럼 창 밖의 풍경을 한 개도 놓치기가 싫어서 눈을 뗄 수가 있어야지. 내가 운전대를 잡은 게 아니었는데도, 내가 일정을 진행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잠깐 여기서 내리자고 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곳들을 지나 오래되고 낡고 생소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길은 중세 유럽 사람들이 몽생미셸 수도원으로 순례를 하던 길이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자동차도 없어서 걸어야 했고, 중간에 도적을 만나 객사할지도 몰랐던 무서운 길이었을 수도 있는 길. 가는 내내 창밖을 보면서 "1,000년 전 여기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풍경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들어서 뭔가 모르게 이 길 위에 내가 지나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분명히 나는 목적지를 정해놓고 가는 길인데 수 천 년 전을 생각하면서 여정을 즐기고 있었다.
몽-생-미셸 가는 길
파도를 멈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진을 찍는 일이다. 하지만 사진마저도 멈춰 있는 공간에 삼각대를 놓고 반복해서 누르는 게 아니라면, 사람이든 공간이든 같은 곳에서 사진을 또 찍는다 해도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같은 장소에 가더라도 날씨가 다르면, 계절이 다르면, 함께 있는 사람이 다르면 그곳은 완전히 다른 장소라고 느낄 만큼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상도 그렇고 싶다. 반복되거나 전날보단 별로더라도 매일이 조금은 새로웠으면 좋겠다.
하지만 변화하기 때문에 또 삶이 매 순간 의미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지금"이라고 말도 정확하게는 방금 전의 순간을 일컫는 단어가 된다. 몽생미셸 수도원에 가는 길, 달리는 차 안에서 풍경이 좋다며 카메라에 담았던 수많은 지금. 그 사진을 찍었던 장소들은 정확히 어디쯤일까.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 또다시 가면 그때 본 그 풍경과 정확히 일치하는 지점에 서있을 수 있을까. 그게 쉽지 않은걸 잘 알기에 나는 몽생미셸 가는 길, 그 모르는 길 위에 서있거나 지나는 게 참 소중했다.
프랑스 몽-생-미셸 수도원 여행정보
몽생미셸 수도원은 '바다 위 작은 섬'처럼 있다가 썰물 때는 갯벌을 지나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천 년 전 어느 수도사 꿈에 바위로 된 섬에다가 예배당을 지으라는 미카엘 대천사의 명령으로 이 신비로운 곳을 짓게 됐다는 신화가 있다. '미카엘'이 프랑스어로 하면 '미셸'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언덕 위 성스러운 미카엘 대천사의 산'이라는 뜻으로 '몽-생-미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서해에서 나고자란 내 입장에서는 몽생미셸 주변의 밀물과 썰물이 그저 그런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유럽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갯벌이 펼쳐진 해안가를 쉽게 볼 수 없기에 이곳을 성스럽다거나 경이롭다며 희귀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바위로 된 섬 가운데 성당의 이름도 '라 메르베유(La Merveille)'라고 부르는데, 이는 프랑스어로 '경이로움'을 뜻하고 있는 단어였다.
성당 내부를 투어 하다 보면 천 년 전 미카엘 대천사가 오베르 주교에 꿈에 나타났던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천 년 전이면 신앙심이 절대적이었던 시기, 사람들이 그 시절 신화를 여전히 신뢰하는 건 '바다 위'라는 신비한 공간이 주는 분위기 가 한몫했던 게 아니었을까. 고작 100년 정도 사는 내가, 1000년의 기간이 켜켜이 쌓인 길 위, 공간의 오랜 시간을 여행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