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나의 경계
이민자인 당신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이민 십일년 차. 주변에서 다양한 이민자들을 만납니다. 이민 삼십년차도 보았고, 이십년 차도 봤습니다. 이들에게 인터뷰를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민자인 당신에게 일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의미입니까? 예상컨대, 그 답들은 손가락 지문의 모양 숫자만큼 다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일이란 제 자식을 먹여 살리고 대학까지 보내야 하는 긴 여정이지요. 자녀들 비싼 미국 대학 등록금 생각하고, 또 성인이 되면 차도 사 줘야 하지요. 저한테 이 일은 너무 소중하죠. (가상 답안 1)
-저에게 일이란 내 자신을 헌신해서, 성과를 내면 그것이 제 보람이고 꿈이고 뭐 그런거예요. 알아요, 제 생각이 조금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요. (가상 답안2)
네. 맞습니다. 이건 제가 꾸며낸 가상 답안이고 실제로는 인터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물어보지 않았냐고요? 일터에서 만나는 동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가는 퇴근 후에도 이 분에게 붙들려 있을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네, 제 주변에는 이민자들이 많고, 그들 중 일부는 마치 “일=자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들을 보면, ‘일은 곧 나 자신이오, 일을 통해 얻는 성과는 곧 내 삶의 성공이자 경제적 보상까지 같이 따라오기 때문에, 나는 일에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당신처럼 일은 못합니다.’라고 속으로만 말합니다. 당신의 업무 스타일을 저한테 강요하지 마세요. 라고 또 속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제 차례입니다. 저에게 물어보세요.
달순씨, 미국 이민 십일년차인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입니까?
저에게 ‘일’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것은 당연히 ‘돈’이지요. 돈을 벌기 위해 저의 노동을 제공하는 곳, 그곳이 일터입니다. 그렇다면 돈은 또 무엇입니까? 저에게 돈은 안정성의 다른 이름입니다. 제가 안정적으로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일을 통해서 자아 실현을 할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제가 생각하기에, 그리고 직장에서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을 정도로만 일합니다. 가끔 일에 ‘막 빠져들다’보면 저의 모든 에너지가 다 빠져나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중에야 그런 생각을 합니다. ‘너무 빠져들지 말지어다’. 일과 나의 거리를 두지 않고 자꾸 일에 빠져 들다보면, 결국 어떤 사람들처럼 되더라고요. 그 ‘어떤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 합니다. “내 말을 믿으세요. 나 처럼만 일하면 이 곳에서 오래 오래 멋지게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곳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거든요.” 여기까진 그럭저럭 봐 줄 만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도 그 사람이 일하는 방식을 보면서 많이 배우기도 하고, 경탄을 금치 못하기도 합니다. 다만 문제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어, 당신? 나처럼 일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뭔가 칼날을 휘두를 때 입니다. 본인은 100만큼 일을 하는데, 동료들이 50도 안되는 에너지를 일에 쏟는다고 판단하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제가 절대로 배워선 안되는 태도입니다. 존중감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죠. 아무리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기본적인 존중이 깔려 있지 않은 태도는 대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전 돈을 받는 만큼만 일합니다. 또, 저는 직장에서 친구를 만들지도 않지만 적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남은 문제는 무엇이냐, 바로 허한 마음입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민자들은 자신의 허한 마음을 일로 채우는 게 아닐까.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고, 마음 맞는 사람도 주변에 많지 않을 때, 그런 곳에서 오는 허함을 일로 채워 버리는 건 아닐까. 일 속에 자신을 뭍어 버리는 것. 그건 제가 원하는 삶은 아닙니다. 마음이 허하고, 비어 있고, 바람이 막 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저는 그냥 그런 마음을 느끼고, 글로 쓰면서 마음을 표현하고 대면하다 보면, 뭔가 좀 더 내 자신이 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처럼 이민자인데, 돌봐야 할 자녀가 없고, 보살펴야 할 반려견도 없는 싱글일 경우, 저녁이 되면 그 놈의 허한 마음이 아주 괴물처럼 몸집을 부풀려 때로는 저를 잡아 먹을 것 같기도 합니다. 대략 저녁 일곱시부터 열시 잠자기 전까지이죠. 이 세 시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도 남들처럼 이 시간들을 휴식이 아닌 ‘일’로 채워야 할까요? 그러면 그래도 확실한 보상이 어느 정도는 보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스스로에게 ‘일을 더 하라’고 달래봅니다.
“달순, 너도 남들처럼 팀장을 한 번 해 봐. 그러면 집에 와서도 일을 조금 하다보면, 시간도 잘 가고, 괜한 쓸데없는 생각도 안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성과도 나올 거 아니야. 성과 나오면 그것이 쥐꼬리만할지라도, 땅을 파봐라. 쥐꼬리도 안나온다.
싱글 이민자에게 돈은 또 얼마나 중요하니? 넌 이제 기댈 곳이 없잖아. 미국에선 치과 신경치료를 하는데도 한 번에 이천달러씩 쑥쑥 빠져나가……. 그러면 이렇게 심심하다고, 외롭고 허전하다고 밤에 울부짓지 말고, 현실적으로 행동하란 말이야!”
이런 생각을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의 길고 긴, 남아있는 직장 생활을 (Fingers Crossed! 그렇게 되길 희망하지요. 미국에선 그렇게 말하대요. 뭔가 바라는게 있으면, 손가락을 꼬면서 핑거스 크로스드! 신이시여 내게 그런 행운을!) 하려면 언젠가는 팀장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최소한 현재의 저에게 팀장을 한다거나 커리어를 더 쌓는 일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이민자인 저에게 ‘내가 이 땅에 있는 이유가, 나의 시간을 바치는 이유가’ 일 때문인데,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저녁에도 일을 하라는 건……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답은 ‘글쎄올씨다’입니다. 차라리, 돈은 안나올지언정, 이렇게 저의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쓰는 게 저의 개인적 성장에 더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달순의 짧은 구직 스토리: 저는 사실, 한국에서 일종의 dead end: 막다른 길을 느꼈었습니다. 인문학으로 석사를 했는데, 박사를 가기엔 제 엉덩이가 너무 가벼웠고, 저에게 맞는 마땅한 직업은 없었지요. 그래도 일반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제 나이와 긴 가방끈이 오히려 조직 사회에서는 방해만 되더군요. 방황을 하다가 결혼 이민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직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 일이 엄청 대단해서가 아니라, 이 일이 저에게 주는 안정성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남은 것은 이 안정성을 가지고 가되, 어떻게 하면 나의 마음에 있는 이 허함을 아프지 않게, 건강하게, 잘 채울 것인가. 입니다. 그 답을 찾고 싶어서 이 글을 써 봅니다.
지금까지 찾은 답은 소박하지만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운동.
전 진짜 운동을 막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땀을 내야 잠이 잘 오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너무 하기 싫지만, 그래도 꾸역 꾸역 헬스장에 갑니다. 옷을 갈아입고 비장한 마음으로 러닝 머신 위에 올라갑니다. 오죽 운동이 싫으면 저는 꼭 운동을 하고 나서 스스로에게 상을 주는 마음으로 인증샷을 찍어 놓습니다. 그 힘든 삼십분 운동을 너가 했다, 장하다! 그런 의미에서 찍는 사진입니다. 러닝머신위에서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이십분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로윙 머신을 씁니다. 십분 하면 많이 합니다. 그러면 딱 삼십분 채웠습니다! 그리고 아령 운동을 한 오분에서 십분 정도 합니다. 이걸 일주일에 두번, 세번하면 현재로서는 굿 스코어, 잘한 편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힘을 내서 더 자주 가야하지요. 그러려고 이렇게 씁니다. 다짐하려고요.
둘, 퇴근 후 바로 씻기.
저는 이 간단한 습관 하나도 그렇게 못 지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짐합니다. 무조건, 퇴근해서 집 문을 열자마자 화장실로 직진해야 한다. 안 그러면, 퍼질러지다보면, 마구 마구, 꾸역꾸역 먹어대고, 그러다보면 화르르~ 온 몸이 흐물흐물해져서, 씻지도 않고, 심지어 칫솔질도 안하고 자 버립니다. 으아, 이건 최악이지요. 네. 일을 많이 하다보면,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바로 이 상태가 되더군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상태’가 되면 일상이 오물 속에 빠져버리는 거죠. 저는 제 일상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나친 노동을 삼가하겠습니다.
셋, 좀 더 높은 곳으로.
많은 이들에게 그렇듯이 일에서 뭔가 신나고, 즐겁고, 내가 성장하는 기분이 들고, 그런 것은 좀 적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것들을 자꾸 자꾸 찾아야 합니다. 제가 최근에 찾은 것은 팟캐스트 듣기입니다. 네, 저는 이민자가 되어서, 한국에서 ‘본인인증’되는 길이 막혔습니다. 그런데 인터넷과 기술의 발달로, 팟빵에 문의를 했더니 이메일로 본인인증을 시켜줘서, 저는 너무도 오랜만에 제가 예전부터 좋아했던 분의 팟캐스트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작은 변화는 제 일상에는 너무도 큰 선물입니다. 이 팟캐스트를 듣다 보면, 그래도 조금 더 제가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힘이 되는 말들도 정말 많이 얻습니다.
그래도 사실은 시간이 남습니다. 가족과 통화를 하기도 하고, 일기를 짧게라도 쓰기도 하고,뉴스를 보기도 하고, 설거지를 하지요. 이민자의 주중은 이렇게 너무도 심심하지만 또 안정적으로, 조용하지만, 속에서는 터질 것 같은 갑갑함이 있지만, 휴가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달래며 시간을 흘려 보냅니다.
네, 이민자 달순에게 일이란 돈이고, 안정감입니다. 그래서 받는 만큼 일하고, 돈 못 받는 오버타임은 사양입니다. 그리고 동료들과 적절한 관계 유지를 하면서 적도 친구도 만들지 않습니다. 대신 일을 적당히 하고 물가 높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아서 조금은 짠순이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남는 외롭고 공허한 시간이 독이 아닌 비타민이 될 수 있게 운동하고, 씻고, 가족과 대화하고, 설거지도 당일에 꼭 하고, 뉴스보면서 세상을 따라가고, 팟캐스트 들으며 성장을 도모합니다. 뭔가 브랜드 마케팅 같은 글이 되어 버렸군요. 제 일상을 잘 만들기 위해 일이 있는 것이지, 일을 위해 제 일상을 바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만……
추신: 저는 이 글을 계기로 혼자 이 프로젝트를 해 볼까 합니다.
이민자에게 땡땡이란 이란 제목으로 아래의 글들을 생산해 보고 싶습니다.
이민자에게 일이란
이민자에게 고국이란
이민자에게 결혼이란
이민자에게 자식이란
이민자에게 모국어란
이민자에게 영어란
이민자에게 고향 친구란
이민자에게 형제, 자매란
......
사실 더 정확한 이름은 '이민자 달순에게 땡땡이란'이겠지요.
어떻게 제 한 사람의 경험으로 이모든 것을 보편화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