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터, 직장 사람들, 옷걸이와 옷, 꼬리표와 사람
팟럭을 준비하며.
팟럭은 지금까진 주로 남편의 직장을 위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오늘 아침까지 잔치용 잡채를 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썼다. 아아아. 뭔가 정성이 잔뜩 들어가야 맛이 있을것 같아, 손도 열심히 닦고, 좀 뜨거운데 덜 식은 잡채에 식용유를 뿌려 비비느라 손까지 데워졌다. 아휴휴휴휴휴휴.... 이게 다 뭔가 싶기도 하고, 감정의 '절정'은 맛보기에서 터져버렸다. 평소엔 둘 만 먹으니 많이 해 봤자 4인분을 하는데, 이번에는 일에 가져갈 것도 만들고, 또 남편과 먹을 것도 생각해서 '궁중 잡채'면 두 다발을 썼다. 작은 냄비 안에서 끓던 뚱뚱하고 많은 8인분 면이 불어 버리는 데서 '삐꾸'가 났다. 면을 많이 데칠거면 냄비도 큰 걸 써야 하는데, 큰 냄비는 딱 하나라 나중에 전부 넣고 비빌 생각에, 작은 냄비에 면을 우격다짐으로 넣은 탓이다. 에이 뭐 잘 되겠지...... 면은 불고, 나중에 또 간을 보니 아니 이게 '웬열......' 잡채가 달면 어쩌잔 말인가...... 문제는 레시피에 있는 것보다 '향신간장'을 4스푼 더 넣었더니 발생한 탓이다. 나의 정성은 그야말로 물거품이 되려는 것 같다. 또한 '내 식'으로 먹는것인데, 왠지 미국인들의 음식 입맛은 '달고 짜고'가 더 강한것 같아, 괜히 그 마음을 따랐다가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설거지는 한더미인데, 또 몇시간 후면 출근이다. 꿀꿀해진 마음을 데리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그런데 산책에서 돌아와 조금 식은 잡채 맛을 보니 '오우!'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돼지고기, 마늘, 간장, 후추, 참기름, 참깨, 설탕, 유기농 파프리카 색깔별로 세 개(글쎄, 한 개당 3불짜리라는 금파프리카다), 버섯, 설탕 등을 넣은 팟럭 음식이 준비되었다. 정말 아무것도 세상엔 공짜가 없다. 직장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 유지를 위해서 이같은 노력이 들어간다. 그래도 더욱 다행이고, 참으로 좋은 것은 그 사람들이 대부분 참 마음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점. 그 중 특히나 마음씨 깊은 사람 A는 내게 특별한 의미로 남을 것 같다. 그는 내 일터의 코치다. 어찌나 눈치가 빠르고 상황 판단력이 좋은지 나는 진심으로 그가 매니저급으로 승진하기를 바란다. 그의 뛰어난 이 기술들은 일반 사원의 자리에서 묵히기엔 아까웠다. 그런데 아직 그는 자신이 없는지 내 진심어린 이 사원의 조언을 얼마나 진지하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지는 모르겠다. 또 다른 동료 B역시 내게 좋은 호의를 보여줬다. 사실 그는 내게 "한국에서 왔다고? 혹시 설마 개고기 먹어?"라고 물었다. 훔. 가끔 저런 질문을 받긴 하지만 썩 즐거운 대화는 아니다. 나는 '역사적으로 예전에 한국 사람들이 가난해서 소, 돼지 고기가 귀해서 먹지 못해 단백질 섭취를 위해 개고기를 먹은 것이다. 요즘 세대 사람들은 거의 안 먹는다. 나도 강아지를 키운다.' 정도로 말했다. 한국에서 근 삼십년을 살다, 미국에 온지 오 년이 조금 넘은 나와, 미국 워싱턴 주에서 평생을 산 그와 나 사이의 문화 간극은 딱 이정도다. 그래도 대화를 더 하고, 이런 저런 농담도 하면서 가까워졌다.
요즘 이 일을 하면서 많은 느낌이 들었다. 최근에는 매일 12시간씩 일터에 있는데, 아주 그냥 삭신이 쑤시고, 정말로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다는 것을 절절히 느낀다. 따라서 '그 누구라도,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같아 보여도, 내가 직접 그 일을 해 보지 않은 이상, 결코, 절대로 그들에 대해 깔보거나 얕보거나, 그들과 그들의 일에 대해 낮게 생각하는 마음'따윈 퉤퉤퉤 길에 버려야 한다. 한번은 우연히 길을 가다, 유리창 청소를 하는 남자의 손길을 유심히 보았다. 어찌나 유리창 하나 하나를 열심히, 자신이 정해놓은 규율에 따라 잘도 닦는지 감탄사가 나왔다. 어쩌면 참 지겨울 수도 있는 저 일을, 매초 꼼꼼하게 정성껏 닦는 그의 모습 자체로 고개를 숙이고 싶어졌다. 만약 그가 나를 봤다면, '아니, 저 이상한 동양 아줌마는 왜 나를 주의집중해서 오래 쳐다 보는 것이지? 저 눈에 달린 그렁그렁한 것은 눈물인가? 아니, 왜 나를 향해 양손으로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는거야?' 라고 의아한 눈빛을 보냈을 수도 있겠다. '일은 일이다' 한 사람이 청소를 하든, 변호를 하든, 일은 그저 모양일 뿐이다. 그 모양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 그것처럼 중요한 것이 있을까.
나는 무척이나 어리석게도 일의 '모양, 테두리, 태그, 꼬리표'에만 집착했고, 지금도 그 집착을 다 놓았다고 말 못한다. 그런데 이제 아주 조금씩 깨닫는것은 그 꼬리표보다 중요한 것은 그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사람의 마음씨, 자세다. 최근 서지현 검사의 인터뷰를 실은 글에서 이 이야기를 읽었다. 세탁소에 옷걸이가 걸려 있는데, 새 옷걸이가 들어오자, 헌 옷고리가 그랬단다. '너는 이제 앞으로 다양하고 멋진 옷을 많이 입게 될거야. 그런데 그 옷들이 너 자신이라고 착각하면 안돼.' 아아아아아. 한동안 이 말이 내 마음에 잔잔한 파도처럼 울렁울렁 거리며 남아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