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리의 쿠커리] 자몽 브륄레 Grapefruit Brûlée 유튜브 영상
로알드 달의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보면 호두를 까는 다람쥐 방이 나온다. 호두 알맹이를 온전히 제 모양 그대로 깔 수 있는 존재는 다람쥐밖에 없다고 했던가? 호두 껍데기를 탕탕 두들겨서 상했는지 확인한 다음 왼쪽, 오른쪽으로 돌려가며 사람 뇌 모양의 호두 속살만 꺼낸다는 다람쥐. 잔뜩 수그린 채로 자몽을 속껍질까지 까다 보면 그 다람쥐가 생각난다. 이쪽 저쪽 돌려서 호두 속살을 꺼내기만 할 뿐 먹지는 않는 다람쥐.
나는 한겨울의 비타민C 공급원 감귤에서 오렌지, 자몽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귤류는 가능하면 속껍질까지 모두 벗겨서 먹고 싶다는 파다. 뿌리부터 껍질까지 전부 먹어야 하는 마크로비오틱 정신에 완전히 반대되는 쪽인 셈이다. 차라리 껍질을 설탕에 잔뜩 졸여서 필을 만들거나 마멀레이드로 만들면 껍질만 눈이 벌개지도록 먹기는 하지만, 그때도 속껍질은 쓴맛이 강해진다고 넣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니 여하튼!
생귤을 껍질째 와작와작 먹는 사람은 없지는 않겠지만 많지도 않을 테니 겉껍질을 벗기는 과정까지는 수월하지만, 속껍질 겉에 붙은 하얀색 섬유질을 떼어내는 순간부터 엄마의 잔소리에 직면한다. 껍질째 먹어야 건강에 좋다느니, 그게 다 비타민이라느니. 아니 나는 달콤한 귤을 먹고 싶을 뿐인데. 지금 손에 든 귤이 얼마나 달콤할지도 입에 넣어 봐야 아는 일인데, 단맛을 상쇄하는 씁쓸한 맛이 나는 데다가 질겅질겅 입 안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속껍질까지 먹어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영양가 따위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물론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주장한 적은 없고, 혼자 입안으로 우물우물 중얼거리면서 꿋꿋하게 속껍질까지 벗겨서 하나씩 야금야금 먹어 치운다.
놀라운 점은, 이제는 딱히 그러고 있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지만 어릴 적만큼 앉은 자리에서 귤을 반 박스씩 먹어치울 기력도 소화력도 없는데 귤은 까고 싶다는 것이다. 주황색 겉껍질을 까고, 하얀색 줄기를 뜯어내고, 가운데를 톡톡 갈라서 질긴 속껍질을 양쪽으로 과자봉지 뜯듯이 쭉 뜯어내서 통조림 귤처럼 알맹이만 남기고, 옆 사람 입에 넣어주고, 다시 귤을 깐다. 왜? 재밌으니까.
그리고 자몽 까기는 귤보다 네 배 정도 재미있다. 분명 네 배 정도 크니까 속껍질도 훨씬 질겨서 생각보다 쉽게 잘 뜯어진다. 그리고 확실히 뚜렷하게 속껍질을 제거해야 맛있다. 질기니까! 반으로 썬 다음 한쪽이 톱니로 되어있는 자몽 숟가락으로 떠먹기도 하지만 그러면 손실되는 과즙이 더 많고, 내가 속껍질을 뜯어내는 재미가 사라진다(중요).
여하튼. 내가 먹기 위한 용도라면 일단 속껍질을 모두 벗겨서 자몽 알맹이만 통조림 귤처럼 남긴 다음 브률레를 해보려고 애썼을 것 같은데, 다행히 나 이외의 페퍼리 멤버들은 나보다 이성적이고 미적인 감각이 뛰어나다. 그래서 완성한 새콤달콤한 자몽 브률레 만들기 편!
우선 자몽의 윗부분을 자몽 알맹이가 상당히 드러날 정도로 평평하게 자르고, 바닥 면은 얇게 도려내서 데굴데굴 굴러다니지 않도록 한다. 과도로 알맹이와 껍데기 사이에 깊게 칼집을 내서 분리한다. 속껍질과 알맹이 사이에도 과도로 칼집을 넣어서 알맹이를 숟가락으로 쉽게 떠낼 수 있도록 한다.
드러난 자몽 윗부분에 설탕을 수북하게 얹는다. 적당히 살살 얇게 뿌려서는 사탕 층이 생기지 않는다. 아! 이 요리는 몸에 좋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산처럼 얹어야 한다. 그런 다음 토치로 설탕이 녹을 때까지 지진다. 설탕이 녹아서 보글거리면 살짝 갈색이 돌 때까지 계속 지진다. 자몽 가장자리가 살짝 그슬릴 정도로 지진 다음 토치를 끄면 녹은 설탕이 식으면서 크렘 브률레의 표면처럼 바삭하게 굳는다.
이대로 숟가락으로 톡톡 두들겨 깨면서 먹어도 좋고, 그래놀라와 요거트 등을 토핑해서 브런치 자몽 볼처럼 만들어 먹어도 재밌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토치로 불질하는 부분일 것이다. 다만 주변에 가연물질이 없는지 확인하고, 화상을 입지 않도록 주의하며, 여차하면 불을 끌 수 있는 준비와 마음가짐을 하고 시작하자. 맛있는 브런치 시간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