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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N Aug 07. 2023

개와 늑대의 시간

L'heure entre chien et loup




해 질 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이때는 선과 악도 모두 붉을 뿐이다.




< 원본자연도 原本自然圖. 13-95 _ 김근중 作 >



오래전에 '개와 늑대의 시간' (Time Between Dog and Wolf)이라는 MBC 드라마가 있었다.

그 드라마를 보지는 않아서 내용은 정확히 모르지만 참 제목을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황혼'을 표현하는 프랑스어 표현인 L'heure entre chien et loup(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부드럽게 번역한 것이라고 하는데 제목만 들어도 무슨 내용일지 알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무슨 의미일지 너무 궁금하게 만드는 말이라 제목 자체뿐 아니라 드라마에도 충분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의 내용과 별개로 그 말만 보자면 혼란과 혼돈의 시간을 표현할 것일 수도

혹은 보는 관점이나 상황, 판단에 따라 선善이 되기도 하고 악惡이 되기도 하는 그런 양면성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 친구가 바닷가에서 찍은 일몰 사진을 보내주었다.

평소 일출보다 일몰을 좋아하는 내가 생각나 찍었다며 환상적인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이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득 내가 지금 이 '개와 늑대의 시간'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무언가 또렷이 보고 싶지만 보이지 않고, 선과 악을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결론들이 있다.

아름답지만 두려운 것이고, 숨 막히지만 머무를 수밖에 없는 시간.

차라리 어두운 밤이면 나으려나 혹은 빛나는 아침이 오면 개운해지려나 싶지만

어차피 이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르지 못하는 시간이다.


그저 견뎌야 하는 시간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밤이 오고, 또 날이 밝아 아침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보지 않으려 해도 너무도 분명히 보이는 것들이 있겠지.

그때에, 그 분명한 것들을 내 손에 쥐든지 혹은 버리든지 하면 된다.

그러니 조급해 말고, 확인하려 들지 말고, 휘청이지 말고

머무르자.


머무르며 존재하자.

나로.

나 자신으로.



< 바다의, 개와 늑대의 시간_Photo by Y >

  

< 도시의, 개와 늑대의 시간_Photo by 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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