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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여름 Feb 03. 2023

망상에서 명상으로

달리기의 힘

소설가 김연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달리기를 두고 정신적인 운동이라고 말했다. 글을 오래 쓰기 위해 허리힘을 기르려고 시작한 운동이었으나 달릴수록 마음이 가벼워지더란 것.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고 살면서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는데, 이 소설가에 따르면 이야기는 두 종류다. 자신을 더 깊은 어둠으로 내모는 이야기와 어렵더라도 낙관을 그리는 이야기. 그러니까 달리기는 어둠에 빠지는 이야기가 생성되는 걸 완전히 멈출 순 없더라도 좀 더 가볍게 짓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요가를 배우며 해봤던 명상 시간에도 잡념이 끼어들어 명상을 이어가기 어려웠지만 달리기가 끝난 순간 느끼는 적막감과 고요함, 이전보다 말끔해지는 머리는 달리기를 할 때마다 경험한다. 그날 내가 만들고 있던 (그러니까 부정적인 생각들이 주제인) 이야기를 내게서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게 된다.


오늘도 낮 동안 아이에 대한 고민은 새로이 생겼다. 설 연휴 기간 친정아버지는 내게 “네 딸 한 명 키우는 게 애 셋 키우는 것만큼 힘들 것 같다”라고 위로(?)했고, 어제 아이와 둘이 시가로 간 남편은 아주버님이 너무 힘들어하셔서 일찍 왔다고 했다.(그는 시가에 가서도 소파에 드러누웠나 보다) 아주버님과 날짜를 맞춰 시가에 갔으나 아주버님이 자신의 아들 둘 (10세, 5세)보다 내 딸과 놀아주는 게 더 힘들었다는 전언. 영상이라도 틀어주면 좀 쉴까 했는데 여섯 살 내 딸은 영상도 안 본다. 시조카들이 넋을 잃고 보는 만화영화도 3분 보면 그 이상 안 본다고. 어디 집중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ADHD면 어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다고 책을 썩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와 두 시간 놀아주다 지쳐서 내 책을 읽으려고 꺼내 들었더니, 딸이 작가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첫 글자를 가리키며 “백”이라고 말하자 아이가 뒤이어 “수, 린”을 읽었다. 아이는 내가 뭔가를 가르쳐주는 걸 싫어하고, 내가 썩 계획적인 엄마도 아니라 어린이집 친구들이 한다는 구몬과 같은 학습지도 시도 안 했으나 주변에 한글 뗀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며 내심 걱정도 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아이가 아는 글자가 몇 개 있다는 게 신기해서 옆에 있던 그림책을 펼치자 아이는 엄마의 교육 시작을 눈치챘는지 대번에 짜증을 낸다. ‘왜 내 아이는 영어영상도, 한글영상도 안 볼까. 자기도 놀고 한글도 떼면 좀 좋아. 나도 좀 쉬고. 지금 안 보고 나중에 영상에 심취하면 어쩌지?’ 영상에서 시작된 망상은 나와 남편의 학창 시절로 이어져 딴생각하느라 수업내용을 자주 놓쳤던 기억이나, 들으려고 무진장 노력해도 한 시간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고, 수학시간에 국어 공부하고 국어 시간에 과학 공부했다던 반골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뻗어나갔다.


달리기를 하면서 집에서 시작했던 망상이 더 기나긴 이야기로 이어지려는 걸 멈췄다. ‘아이는 아이 그릇대로, 아이만의 인생을 살 것이다.’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걱정도 조금 가벼워졌다. (집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매트 바닥을 파고 있었을 것이었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양호하고, 풍속도 약하고, 기온 영하 4도 정도로 겨울밤 뛰기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15분쯤 지났을 때 자세가 흐트러지고 호흡이 불규칙하다는 걸 느꼈다. 사냥개로 보이는 검고 큰 개가 있어 달리던 길을 돌아갔고, 다른 작은 개 한 마리를 마주쳐 개를 놀라게 할까 봐 속도를 늦췄고, 다시 검은 개를 만나 또 돌아갔으며, 목줄을 하지 않은 다른 개 한 마리까지 마주쳤던 게 이유였던 듯하다. 20분이 지나자 호흡이 더 가빠져 오늘의 달리기를 제대로 끝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커졌다. 속도를 늦추더라도 자세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허리를 고쳐 세우고 호흡을 일정하게 맞췄다. 때마침 달리기 플레이리스트 곡 중 이매진 드래곤스의 ‘Believer’가 나왔다. 이 음악은 듣는 이가 무얼 하든 간에 웅장함을 부여받는 착각을 일으킨다.


40분간 달리기를 끝내고 오늘의 페이스를 확인했다. 7분대 후반이나 8분대를 예상했으나 결과는 6분대였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반년이 되었지만 페이스 예상은 번번이 빗나간다. 그러나 이제 어렴풋이 알게 되는 건 내 머리가 무거울수록, 가슴이 답답한 날일수록 페이스는 의외로 좋다는 거다. 학부모 공개수업 전날 페이스도 예상외였고, 추석 연휴 전날 밤에는 5분대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내 무릎이 부디 오래오래 버텨주기 바란다. 무거워지려는 내 마음과 자꾸만 생성되는 고민들이 나쁜 이야기로 흐르지 않게, 낙관을 그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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